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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7 18:30 수정 : 2019.12.27 18:34

[뉴스AS]
18일 첫 법정 승소한 ’일본 미투 상징’
가해자 항소 기자회견에 기자로 참석 뒤
한겨레 젠더데스크에게 “한국에 감사”
자매애로 맺은 한-일 인연 이어가고파

안녕하세요. 지난 5월부터 <한겨레> 젠더데스크를 맡고 있는 임지선 기자입니다. ‘젠더데스크’는 <한겨레>가 언론사 최초로 만든 직책으로, 기사는 쓰지 않고 여기저기 젠더 차원의 딴지를 거는 일을 합니다. 지난 7개월 시행착오의 기록은 앞으로 조금식 공유할게요. 오늘은 이토 시오리씨가 보내온 메시지를 전하려 글을 씁니다. 네, 최근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일본 미투의 상징’ 이토 시오리 맞습니다.

2019년 12월19일 <한겨레> 1면 (왼쪽)·2018년 10월13일 <한겨레> 1면

지난 19일, <한겨레>는 1면에 이토 시오리가 민사 소송에서 승소해 활짝 웃고있는 사진을 실었습니다. 도쿄지방재판소는 지난 18일 “(합의된 성관계라는) 가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며 가해자가 330만엔(한화 3500만원)을 시오리씨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시오리씨는 판결 후 기자회견에서 “형사사건은 불기소 (처리)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게 됐지만, 민사소송을 제기해 공적인 법정에서 증거를 내놓아 조금이라도 (사실이) 공개됐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한겨레> 1면에 활짝 웃는 이토 시오리의 사진이 실린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습니다. 1년 전 <한겨레 토요판>이 “이토 시오리는 울지 않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었죠. 그 당시 같이 울며 인터뷰했던 인연으로, 저는 두 개의 1면 사진을 이토 시오리에게 보냈고 그가 제게 “고맙습니다”라며 절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이어,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기사와 책을 통해 제 이야기를 접한) 한국 사람들이 보내준 응원과 지지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제 책 <블랙박스>를 가장 먼저 번역 출간한 나라입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에게 자매애를 느껴왔습니다. 또 한국이 성폭력을 막기 위해 하는 노력으로부터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힘을 모아 더 많은 단계를 해쳐나갑시다. 그리고 당신의 긍정적인 에너지, 정말 고맙습니다.”

따뜻한 메시지를 들으며 한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번 민사 소송은 이토 시오리씨 사건이 법정에서 정식으로 처음 다뤄진 자리였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났지만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아 형사소송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는 민사 소송 패소 뒤에도 당당하게 기자회견을 열어 “억울하다“며 “항소하겠다”고 했습니다. 이토 시오리는 그 기자회견에 기자로 참석했습니다. 그 뒤 제게 보낸 메시지에서 이토 시오리는 “당장은 너무나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했습니다.

민사 소송 승소 직후 가해자인 야마구치 노리유키 전 <도쿄방송>(TBS) 워싱턴 지국장이 연 항소 기자회견에 기자 자격으로 참석한 이토 시오리의 모습. 영상 갈무리.

이토 시오리는 스물여섯살 언론인 지망생이던 2015년 4월, 야마구치 노리유키 <도쿄방송>(TBS) 워싱턴 지국장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공포와 불안에 떨다 5일 만에 찾은 경찰서에서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수사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고 담당 검사는 “블랙박스(밀실)에서 일어난 일이라 알 수 없다”며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는 불기소 처분을 내렸죠(2016년 7월). 일본 역사상 성폭행 피해자 최초로 얼굴을 공개하고 기자회견도 열고(2017년 5월), 자신의 얼굴을 표지로 한 책 <블랙박스>도 출간해봤지만 검찰심사회는 또다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기자가 되려고 참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경험을 쌓으려고 대학 때는 인턴이나 ‘대학생 기자’라는 이름의 활동도 찾아다녔죠. 얼마전 당시 활동을 같이했던 이들과 모임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알았습니다. 20대 초중반 여성으로서 인터뷰 대상자에게, 언론계 선배라는 이들에게 은밀한 술자리를 제안받고 치근덕거림을 당했던 사람이 나 뿐이 아니라는 것을요. 여럿이 함께하는 자리인 줄 알고 갔는데 둘 뿐이고, 자꾸 술을 권하며 개인적인 얘기를 묻고, 손사레를 쳐도 차에 태워 자신은 아내와 부부관계가 안좋다며 다음엔 언제 만날까 묻던 그들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기분이 술기운처럼 올라왔습니다.

지난해 가을 이토 시오리를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언론사 입사를 희망하며 인턴 자리를 구하고 누군가 조금만 능력을 인정해주면 감사해하며 뭐든 최선을 다했던 20대 초중반 이토 시오리의 모습은 그저 나 같았습니다. 언론사 고위직 선배가 업무상 누군가를 소개해준다 해서 나간 자리는 알고보니 둘만의 술자리였고, 정신을 차렸을 땐 약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이토 시오리가 말하다 울었을 때 듣고있던 저와 여성 통역사도 같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 시오리의 승소 소식이 전해진 뒤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통역사에게도 메일이 왔습니다. 그는 “이토 시오리씨 승소 후 일본외국특파원협회를 통해 야마구치 노리유키가 기자회견을 할 때 그 자리에 시오리씨가 앉아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진정한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 기자회견을 어떻게 참고 듣고 있을까, 마주하는 것 만으로도 치가 떨릴텐데 싶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숨이 막히고 1년 전 통역하며 느꼈던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2018년 10월 이토 시오리(오늘쪽)를 한겨레 임지선 기자(왼쪽)가 인터뷰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래도 이토는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에서처럼 계속 한 단계씩 나아갈 것입니다. 그는 한국의 미투에서 많은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특히 1년 전, 한국 미투의 시초인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과 만나 손잡고 운 일이 그를 크게 위로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전 성폭행 피해를 당한 지 3년쯤 지났는데 얼마나 더 지나면 잊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연세가 93살인 김복동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고 눈물이 나올 거요. 죽어야 잊히겠지.’ 김복동 할머니는 8년간 위안부 생활을 하셨다고 했어요. 전 딱 하루였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성폭력이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나서 그 사건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겁니다. 내가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아줘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그 일 때문에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안심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해도 충분합니다. 한국의 성폭력상담소에서 들은 말을 돌려주고 싶어요. ‘당신이 그때 취한 행동은 최선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줘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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