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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4 07:11 수정 : 2019.12.14 09:57

[판을바꾸는언니들⑬ 마지막회] ‘판을 바꾸는 언니들’ 결산 토크쇼

‘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2030 여성들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과연 불평등한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변화를 이어가려면 어떤 동력이 더 필요할까. 올 한 해 ‘판을 바꾸는 언니들’ 인터뷰를 12회 연재하며 독자들한테 받은 질문들이다. (▶연재 바로가기 : ‘판을 바꾸는 언니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판을 바꾸는 언니들’ 토크쇼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최원영 간호사, 홍진아 빌라선샤인 대표, ‘테크페미’의 옥지혜 서비스 기획자, 대전 여성주의 잡지 <보슈>의 권사랑 대표와 서한나 편집장, 여성 소설가 모임 ‘왓에버’의 조우리·천희란 작가,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FDSC)의 김수영·한경희·김소미 디자이너가 참여했다. ‘판을 바꾸는 언니들’ 독자들이 청중으로 함께했고, 기자가 독자들의 궁금증을 모아 질문을 던졌다.

#1. 여성의 존재를 ‘티’ 내고 동료를 찾자

―“남성의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이 부러워요. 이유없이 위축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란 독자의 질문이 있어요. 홍진아 대표님은 인터뷰에서 여성이 나서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 답을 해주고 싶나요.

홍진아 “사실 마음먹는 게 중요하지만 쉽지 않잖아요. 결국 ‘너는 이런 걸 잘한다’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좋은 동료를 주변에 두고, 가치관이 비슷한 여성을 적극적으로 만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모임에 함께 데려가거나 서로를 챙겨주는 남성들처럼 여성도 네트워킹을 더 적극적으로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 꽤 잘하잖아’라고 말하는 동료를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주변의 동료를 찾고 연대하는 것이 변화의 동력이라고 인터뷰한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조우리약간의 힌트만 줘도 동료들은 알아보는 것 같아요. 휴대폰 플래시처럼 작은 불빛만 보여줘도 그 빛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연결이 돼요. ‘왓에버’도 차현지 작가가 용기있게 소리를 내서 모인 거예요. 저도 차 작가를 올해 기사를 보고 알았는데 ‘(뭐라도) 같이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래서 (여성이) 약간의 ‘티’라도 내야 하는 것 같아요. 당장 뭘 하는 건 아니더라도 ‘너도 거기 있고 나도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거든요.”

서한나 “최근에 <보슈>에서 비혼 여성 파티를 열었는데 시작 전에 참석자들이 대화하는 걸 보면서 ‘서로를 확인하는 자리가 필요했구나’ 싶더라고요. 또 제가 하는 말에 ‘내가 너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웃어주는 모습이 좋았어요. 얼굴을 대면하고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활동의)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권사랑 “올해 70여명의 비혼 여성과 함께 대전에서 계속 세미나를 해왔는데, ‘서울 사는 여성은 비혼한다고 하지만 지역에선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싶을 수도 있잖아’라는 말을 중년의 정부 관계자가 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놀랐죠. ‘지역 여성이 이렇게 보이지 않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어딜 가든 더 적극적으로 말했어요. 전국을 다니며 지역 여성들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만으로 의미있는 한 해를 보낸 것 같아요.

#2. 부·권력·야망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들은 ‘부와 권력, 야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대개는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돼왔던 단어들이다. 홍 대표는 “사업을 하면서 ‘여성들끼리 모이는데 여성이 돈을 낼 것 같냐’는 이야기를 남성들로부터 굉장히 많이 들었고, 그게 아니란 걸 증명해보고 싶었다”며 “(일하는 여성을 위한) 콘텐츠가 더 잘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일종의 야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천희란 작가는 “어떻게 하면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가 요즘의 관심사”라고 했다.

천희란 “작가로서 비평에 관심이 많아요. 비평은 곧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인데, 그 권력이 정체돼 있을 때 젊은 창작자들이 힘든 일을 겪는 것 같아요. (이런 구조에서) 대항권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면 약간의 부와 권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엔 아예 관심도 없었는데 ‘왓에버’ 활동처럼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연결되려면 결국 부와 권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조우리 “주변을 보니 남성은 보통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하는데 여성은 프리랜서가 되더라고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고민했는데, 홍진아 대표의 인터뷰를 보고 ‘여성이 상상할 수 있는 야망의 범위가 작았구나’ 싶었어요. 사업은 당연히 남성들의 세계라고 생각해 (여성에겐) 생각의 여지조차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야망 있는 여성’을 뵙고 싶었죠.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FDSC)은 최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한 ‘야망 노트’를 이날 나눠주기도 했다. “8가지 질문을 통해 여성 창작자가 하루를 객관화하여 기록하고 야망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이 노트에는 “행복한 일은 무엇인가요” “건강을 위해 무엇을 했나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했나요” 등의 질문에 사용자가 직접 답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판을 바꾸는 언니들> 토크쇼가 열리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3. 자발적인 감정노동은 하지 맙시다

―조직에서 여성으로 일하면서 위축감을 느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는 독자의 질문이 있어요. 어떤 시도를 하셨나요.

한경희 “여성 직원이 많은데 임원은 남성이 많은 전형적인 회사에 다녀요. 일단은 대화할 때나 보고할 때 주눅들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여성이라 기대하는 어떤 특정한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목소리를 작게 낸다거나,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거나 하는 거요. 하지만 쫄지 않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해요.”

―‘남초’인 직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본 경우도 있었어요. 아이티(IT)업계는 어떤가요?

옥지혜 “저는 팀장급이라 팀원을 이끌며 일을 하는데, 일단 말투를 싹 다 바꿨어요. 감정노동을 많이 하니 습관이 된 것 같은데 예전엔 ‘부탁드려요~’라고 말하며 웃는 이모티콘을 같이 넣곤 했거든요. 제가 이렇게 말하니 주변 동료들도 (말투가) 같이 바뀌더라고요. ‘부탁드려요’라며 울음 이모티콘을 잔뜩 넣는다든지…(웃음) 일을 하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사무적인 말투로 다 바꿨어요. 애플리케이션의 성차별적인 설정을 바꿀 때도 먼저 (변명하듯)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걸로 (작업 방식을) 바꿨어요. ‘판을 바꾸는 언니들’ 기사가 나가고도 ‘페미니스트라면서요’란 이야기를 처음엔 들었는데 설명을 안 하니까 더 안 물어봐요. 괜찮더라고요. 그런 장단에 맞추다 보면 더 힘들어진다고 생각해요.”

#4. 지속가능성의 핵심은 근육량이다

변화를 만드는 활동을 이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건강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몸도 마음도 근육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최대 관심사는 근육량”이라는 옥지혜씨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명확하게 사리분별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 위해 체력이 필수 요소이자 최저 조건”이라고 했다. 패널도 청중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1년 동안 인터뷰를 하며 만난 다양한 모임에 ‘운동 모임’이 공통적으로 있었어요. 디자이너분들도 운동 모임을 하고, ‘스여일삶’(스타트업 여성들의 일과 삶)에는 명상 프로그램이 있고, <보슈>에선 축구와 주짓수를 하고요.

최원영 “마음의 근육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울할 땐 뭘 하든 다 안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처럼, 부정적인 자기 예언은 스스로 실현하게 된다고 해요. 계속 부정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안 좋은 쪽으로 선택하고, 결과도 좋지 않은 악순환에 빠지는 거죠. 이때는 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아요. 제가 올해 노조를 갑자기 관뒀는데 ‘나같이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랑은 아무도 같이 일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어떤 분이 ‘어디에서도 활동을 못 하게 할 정도로 그 노조가 그렇게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나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이렇게까지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할 때 ‘정말 그래?’라며 거리를 두고 질문을 던져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것도 방법이에요.

#5. 때론 쉼표를 찍는 일이 필요하다

‘균형을 맞추는 삶’의 중요성에도 모두가 공감했다. 내가 지쳤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인위적으로라도 쉼표를 만들어 찍는 것, 무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옥지혜씨는 “‘테크페미’는 무리하지 않는다. 무리가 될 것 같으면 일의 크기를 줄이는 방법을 택한다”고 말했다. “‘여성혐오’가 어느 날 감기처럼 갑자기 낫는 게 아니고 계속 있을 일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내 몫을 다하려고 하다 보니 ‘번아웃’이 정말 심하게 왔어요. 바닥을 치고 난 다음에야 균형을 찾자는 생각이 들었고요. 조직에서 필요한 것을 요구하려면 제 역할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동시에 그게 무리한 건 아닌지 파악하려고도 함께 노력하죠.

―무리하지 않아야 결국 오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여성들은 완벽하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어 더 지치는 것 같거든요.

조우리 “저도 크게 아픈 적이 있어요. 사람마다 망가지는 부분이 다를 뿐 원인은 같다고 생각해요. 과로하는 것, 내가 물러설 데가 없다고 생각해 아등바등하는 것이요. 병원에 있으면서 일하다 쓰러져 오는 30대 여성을 정말 많이 봤어요.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란 절박함이 우리를 무리하게 만드는 걸 텐데, 특히 여성은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주어진 기회가 (남성보다) 적고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신 안 온다고 생각하니까요. 설령 이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도 절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일상에서 투쟁하기에 힘이 달릴 때 어떻게 원기회복 하시나요”란 독자의 질문이 있어요.

김소미맛있는 걸 먹어요.(웃음) 저희는 모임 장소가 잡히면 누군가 그 부근 맛집을 찾아요. 특히 이런 모임을 운영할 땐 일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을 조금 희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상징적으로라도 보상을 받는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요.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도 되고요.”

이들이 정말로 ‘판을 완전히 뒤집어 바꿀 수 있을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가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은 오늘을 만들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현재가 잘 변하지 않고 미래도 잘 안 보여 갑갑해도, 과거를 돌아보면 생각보다 멀리 왔다고 느껴진다”는 조우리 작가의 말처럼, ‘우공이산’이란 말을 가장 좋아해 “방향만 옳으면 언젠가는 바뀐다”는 최원영 간호사의 믿음처럼 변화는 진행 중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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