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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04 10:34 수정 : 2014.05.04 14:44

사회학자 엄기호

‘단속’ 키워드로 사회붕괴를 짚어낸 사회학자 엄기호씨…
‘세월호 이후 세대’ 위한 사회 재건에 대하여

고통의 시간이 벌써 3주째 흐르고 있습니다. 지난 4월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제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진전이나 수습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우리 사회에 계속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끝내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심연의 거울에서 자신의 추악한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 고통은 전국적이긴 하지만 세대마다 지역마다 달리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는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가졌던 사회적 자부심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정신적 공황에 빠져들고 있고, 이 사건의 가장 큰 당사자인 10대 청소년들은 사회·국가에 대한 큰 불신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사회가 아닌 상태의 사회

과장된 표현으로 ‘사회 붕괴’의 상황에 이르게 되자, 우리에게 ‘사회’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게 됩니다. 오랫동안 청년세대와 교육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해왔고, 최근 <단속사회>라는 책을 펴내 한국 사회의 내면적 붕괴 현상을 짚어낸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 사회가 ‘사회가 아닌 상태의 사회’에 접어들었으며,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개입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보고 많은 분들이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을 써요.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때 갖게 되는 최소한의 감정이 ‘보호받고 있다’는 거예요. 어느 범위인가는 사회마다 다르죠. 좋은 사회라면 모두를 다 보호해주는 거죠. 그 최소치가 청소년, 아이라는 존재예요. 아무리 엉망으로 굴러가는 사회도 여기는 최소한의 보호 대상인 거죠. 그런데 그게 완전히 무너져내리니까, 당연하게 ‘이게 사회냐? 우린 도대체 뭐하는 것이냐?’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침몰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게 많아요.

행정체계가 어쩌면 저렇게 체계적이지 않을까, 사회학을 공부하는 저도 보면서 이게 뭐냐는 소리가 절로 나와요. 이해할 수도 없는 사건이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라, 이후 수습 과정에서 잠정적인 수준에서 대책이라고 내놓는다면 그게 더 비참할 거 같아요. 그것 말고도 근본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게 있어요. 고통의 문제, 즉 고통과 고통을 듣는 시스템인데요. 사실 관료제와 같은 행정체계는 인간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효율성을 높이는 사회의 큰 활동축인데, 이게 근본에서 붕괴됐다는 느낌이죠. 단순히 시스템의 어느 부분이 붕괴된 거라면 앞으로 고치면 되는데, 우리가 지금 엄청난 좌절감을 느끼는 건, 그 근본에서 고통과 고통을 듣는 사람들 또는 시스템 사이의 소통 문제, 이게 완전히 망가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저럴 수 있을까, 거기서 무력감이 들면서 더 이상 우리는 안 될 거 같다는 좌절감이 깔렸어요. 특히 지금 청소년들이 어른들은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도 자기네들도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안 하게 될까봐 걱정스러워요

책임 시스템에서 면피 시스템이 작동  

-그나마 상식 수준에서의 대응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모두 붕괴됐다는 게 충격이에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생겨난 황당한 것 중 하나가,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면서 면피 시스템을 만든 거예요. 책임을 진다는 게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걸 내가 어떻게 책임지고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여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쫓겨난다는 뜻이 된 거죠. 그래서 아무도 책임을 안 지려 하는 거고, 못 지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거죠. 사실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란 건 그 위험이 윗선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과장 직급에서 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와 한계가 설정돼 있고 그것을 넘어가면 빨리 차장, 부장의 권한으로 넘어가는 게 관료제 시스템이죠. 더 큰 위험은 위로 가야 하고 위에서 결정해야 하는데, 지금 시스템은 오히려 위험을 아래로 내려보내는 거잖아요. 무슨 일이 벌어지면 위험, 곧 책임은 아래로 내려가요. 그러다보니 밑에 있는 사람들은 면피하는 방식으로 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죠. 이번에도 대통령이 자신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오히려 다 책임을 묻겠다고 하니까 안 움직이는 거죠.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면피 시스템인 거죠.

-이번 사건에서 컨트롤타워의 부재도 많이 지적됐어요.

평상시의 책임 시스템이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다면 전시나 재난이나 위기시엔 어떤 체계의 특정 지점에 무한대의 권한을 부여해줘야 해요. 9·11 테러 당시 현장 책임자에게 모든 권한이 주어지고 전적으로 그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잖아요. 배가 파손된 상황이면 선장에게 모든 권한이 가야 하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선장은 권한이 없고 회사 눈치를 봤다는 거고, 해경 역시 비용을 누가 내느냐 하는 문제로 시간을 끌다가 결정적인 시간을 다 놓쳤다는 건데, 이게 정말 황당한 거죠. 결국 재난이나 위기에서 대응 권한의 소재 문제가 면피 시스템과 결합되니까, 긴박한 순간에 정확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 거죠. 그럼 그 위에서라도 돈 문제나 부차적인 것은 나중에 처리하자고 말해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결국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어나가는 거죠.

-예전에도 큰 재난은 있었어요. 그러나 사고가 수습되면 예방 대책을 세워보자 이랬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있어요.

예전 사건들은 제한적인 영역에서 제한적 무능과 제한적 잔인함을 보여줬기에 이것만 고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이번에는 한국 사회의 완전한 민낯을 총체적으로 드러냈다는 충격이 있어요. 우리가 속한 이 사회와 국가가 얼마나 무능하고 잔인한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다 보여줬다는 점에서 충격이 큰 거죠. 무능하기만 하면 문제가 아닌데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 통제할 만한 어떤 권력이나 힘, 이런 게 얼마나 없는지까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죠. 정치나 행정, 권력이 아무리 얘길 해봤자 듣지 않잖아요.

변화도 반영도 없다는 사회적 무력감

-그런 의미에서 지금 국민이 느끼는 것 중에 슬픔과 죄책감 외에도 사회적인 무력감이 있어요.

사회적 무력감은 2008년 촛불시위 사건 이후 쭉 축적돼온 거 같아요. 촛불시위 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어요. 그러나 그 결과는 말로 정치에 개입해 통제한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해져버렸는지를 사람들이 느끼게 된 거죠. 아무리 난리를 해도 권력이 안 듣는다는 것, 변화도 반영도 없다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이 있어요. 정치는 공론화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듣고 뭔가를 해내는 건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구조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인 거죠. 말 자체가 완전히 조롱거리 또는 냉소의 대상이 돼버렸어요. 정치와 국민의 관계뿐이 아니에요. 내가 고통스럽다고 말해도 그 언어가 저쪽으로 가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는 느낌은 국민 사이에서도 분열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죠. 사회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듣고 공감할 줄 아는 것인데, IMF 이후 한국 사회는 철저히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체제로 지내왔어요. 남을 돌봐선 안 되는, 오히려 돌보면 같이 탈락하기에 그걸 외면하는 것만 훈련된 거죠.

-이 사건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로 크겠지요.

정말 가슴 아픈 게 산업화 세대건 민주화 세대건 그동안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건데 그게 다 깨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의 공허함, 상실감이죠. 이번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가장 큰 것이 불신이에요. 아무도 안 믿게 됐다는 것이 이후 역사에서 엄청난 후폭풍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요. 누가 무엇을 믿겠어요. 이제 각자도생하는 거죠. 두 번째는 재난의 계급화예요. 그동안 우리 모두는 ‘위험’에 대해 마치 사회 구성원 전부가 겪는 일인 것처럼 말해왔고 대처해왔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죠. 이 사건을 보면서 ‘강남 아이들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감히 이렇게 말 못하는 거죠. 이 두 가지가 겹치면 이제 한국 사회는 권력과 돈을 가진 아이들만 각자도생에 성공하는 사회라는 결론이 나오게 돼요. 각자도생하는 사회에서 누가 못 살아남고 누가 살아남느냐, 이것도 너무 명백한 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건 이미 ‘사회’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그 상황의 도래를 저지해야 하는 거예요.

견뎌야 하는 걸 견뎌야 하는 것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바다에 침몰한 세월호와 아직도 갇혀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차마 말로 뱉어내지는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더 힘들어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학자 엄기호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번 사건은 분명 ‘세월호 이후 세대’를 만들어낼 거예요. 각자도생의 길이 열리기도 했지만 새로운 각성에 이를 수 있는 세대이기도 하죠.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안전이라고 하겠죠. 그러나 어떻게 안전해질 것인가, 거기에만 매달려선 해결이 안 돼요. 뺑뺑이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기만 하면 그게 좋은 사회일까요? 아니라는 게 드러났잖아요. 아이들의 죽음 앞에 모두가 애통해하는 것 중 하나가 ‘이럴 줄 알았다면 학원 안 보내고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말걸’ 하는 거잖아요. 그 의미는 단 며칠이라도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좋은 삶이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너하고 나하고 살고 있는 지금 이 삶이 좋은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려면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나, 사회는, 노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고민해야죠.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문제가 제기되니 혼란스럽기까지 한 측면이 있어요.

제가 한국 언론은 ‘포르노’라는 말을 쓰는데요. 포르노라는 게 표면, 즉 행위만을 너무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지금 우리가 언론을 통해 애도하는 행위의 많은 부분이 ‘실시간’이에요. 실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표면을 얘기하는 거라면, 심층은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봐야 하는 거예요. 다시 표현하면 이건 ‘견디는 것’이거든요. 지금 이 시간과 우리가 보는 모든 사실을 견뎌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제일 못하는 게 ‘견뎌야 하는 걸 견뎌내는 것’이에요. 정권도 마찬가지고 우리 스스로도 내부에서 희생양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희생양을 잡아 제단에 올려놓고 모든 책임을 묻고 끝내고 싶어 하는 충동이 일어나죠. 게다가 정권이 바라는 건 우리가 ‘애도’만 하는 거예요. 영원히 슬픔에 젖어 있는 거죠. 계속 애도를 하지 않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도록. 특정인이 골프 친 것을 문제 삼는 유의 기사가 그런 거죠. 애도와 미담 두 가지 중 하나만 하라는 거예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른바 정치가 시작되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거고, 누군가 책임을 지게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하는 거죠. 이게 항상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해왔어요. 애도와 미담 외에 다른 걸 하면 불순하다는 이름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걸 금지시켜버렸어요.

-우리 안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정확한 질문을 던지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저도 울고 있고, 우리 다 울고 있잖아요. 애통해하고 무력해하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고 있느냐 고민해봐야 해요. 애도의 방식이 중요한 문제가 되죠. 지금 드러난 것은 혼자 골방에서 슬퍼하거나 분향소에 가서 국민으로 슬퍼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하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 중간에 사회적 애도가 있어요. 학생은 학생들끼리, 교사는 교사들끼리 함께 모여 이 사건을 애도하고 슬퍼하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토론하는 거죠. 아직은 그런 애도가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애도’는 모여서 같이 슬퍼하는 거거든요. 동그랗게 모여서 대성통곡하는 거죠. 같이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그것은 축제·집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전교조가 지금 전국교사대회를 열어야 한다고 봐요. 고등학생연합이 있다면 아이들끼리 모여서 왜 우리가 이렇게 죽어가야 하나, 어른들에게 묻는 거죠. 그런 ‘단위’가 있어야 해요. 저의 표현 방식으로 하면 ‘곁’을 주는 ‘단위’가 있어야 사회가 되는데, 지금 우리는 이런 것들이 불허돼, 개개인이 완전히 개별화하거나 국가화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사회’가 아니라는 거죠.

신뢰 공동체를 만들수 있다는 희망을

-질문을 계속 던지고 ‘사회’를 재건하자는 것이죠. 각자의 영역과 분야에서.

그렇죠. 이번 참사를 보면서도 권력만 자꾸 그 비판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흐름이 있죠. 공중전만 하고 있어요. 그건 어떻게 보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지금 정권이 바뀐다면 과연 문제가 해결될까요? 한국 사회는 충고와 조언의 공동체가 없어졌어요. 오래전에 가족이 있었지만 IMF 이후 해체되거나 극도의 이기주의로 흘렀죠. 이 공동체는 신뢰와 상호 호혜성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만들어지거든요. 이제라도 그걸 만드는 작업을 해야죠. ‘사회’라는 걸 만들기 위해선 폐쇄적이지 않은 사회의 최소 단위들을 만들어요. 예를 들면 세미나든 동네 주민 모임이든 이런저런 모임이 많아야 하는 거고, 그 모임들 속에서 실제적인 게 발견되는 거잖아요. 우리 동네는 어떠냐,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토론하고 의지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공동체를 만들어요. 그리고 이걸 지지해주는 정치권력을 창출해내는 것에 이르러야죠.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런 주장들이 나와야죠. 학생들에게 애도의 권리를, 애도의 공간을 주자. 시민사회단체는 불온한 일을 해야 해요. 아이들과 같이 모여서 애도하는 일. 지금의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적 에너지로 바꿔 그 아이들이 사회의 주체가 되고, 다시 신뢰의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죠.

변호사
녹취 강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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