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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8 09:06 수정 : 2020.01.18 09:41

“같은 국민으로 탈북자들을 봐주면 좋겠어요. 우리 탈북자들도 스스로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았으면 해요.” 북송 재일동포 출신의 탈북작가 김주성씨가 지난 13일 오후 탈북민과 다문화가정을 주로 다루는 <배나티브이>(유튜브) 녹화를 마치고, 서울 혜화동 거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북송 재일동포 출신 탈북작가 김주성씨

북한이탈주민 3만명 시대
한국 사회는 아직도 탈북자를
얻어먹는 존재로만 인식하지만
세금 내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일본의 차별 피해 16살에 북송선 타
북한에서 또 다른 차별·억압당해
2008년 2차 탈북 성공… ‘남한행’
“퍼주기라고 해도 김대중 정부 때
남한에 대한 인식 가장 많이 바뀌어”

“같은 국민으로 탈북자들을 봐주면 좋겠어요. 우리 탈북자들도 스스로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았으면 해요.” 북송 재일동포 출신의 탈북작가 김주성씨가 지난 13일 오후 탈북민과 다문화가정을 주로 다루는 <배나티브이>(유튜브) 녹화를 마치고, 서울 혜화동 거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40여년 전 시골 면 단위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대도시인 대구로 갔다. 기찻길 옆집의 방 한칸을 얻어 자취를 하는 것도 낯설었지만 국어시간에 선생님의 지목을 받아 지문을 읽는 게 싫었다. 대구 사투리가 표준어인 교실에서 다른 억양의 상주 말은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 소재가 됐기 때문이다. 대구살이에 겨우 적응을 마칠 즈음 대학 생활을 위해 다시 서울로 옮겼다. 첫 1년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어리벙벙하게 지냈다. 같은 사회 안에서도 서식지를 옮기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 바 있어 일본에서 북한으로, 다시 북한에서 남한으로 삶의 뿌리를 이식해 사는 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 한켠에서 찡한 울림이 먼저 왔다.

재일동포 3세인 김주성(57)은 조선학교 중2 때인 1979년 전교생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일본 니가타에서 북송선을 탔다. 그러나 차별을 피해 간 곳에서는 또 다른 차별과 억압이 있었다. 꿈에라도 다시 가고 싶었던 일본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2008년 북한을 탈출했으나 가족의 거부로 연고가 없던 한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자본주의식 생활을 배우는 것은 그럭저럭 따라 했지만 그에게 힘든 것은 민주주의다. 진보-보수로 갈려 대립하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낯설고 당혹스럽다. 그러나 김주성은 대부분의 탈북자들과 달리 보수 프레임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려고 애쓰고 있다. 그가 ‘홀로 보기’를 할 수 있었던 주요한 힘은 한국에서 읽은 많은 책에서 나왔다.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김주성은 지난해 말 책 읽기의 결과물인 <한국이 낯설어질 때 서점에 갑니다>(어크로스)를 펴냈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공덕동의 한 카페, 13일 오후 서울 혜화동 <배나티브이>에서 김주성을 만났다.

<전태일 평전> <소년이 온다>가 가장 인상적

―책 내고 주변 반응이 어때요?

“이 책을 내면서 살짝 우려했던 점이 혹시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좌파 논리로 몰아가지 않을까였는데 그러지는 않더라고요. 탈북민들은 탈북민의 한 사람이 이런 책을 썼다고 호의적으로 대해주고, 칭찬도 많이 해주시죠. 북한학을 연구하는 교수님 몇분도 ‘참 좋은 글을 쓰셨다’고 격려해주시더군요.”

―책에 관한 책 쓰기를 한 계기는 뭐였어요?

“방송을 하면서 알게 된 출판평론가 김성신씨가 어느 날 ‘한번 책을 써봐라. 왜 작가라는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느냐’고 채근했어요. 한국에 와서 책 읽기는 하지 않고 영화와 드라마에 푹 빠져 있던 저를 깨운 한마디였어요. 그것을 계기로 매주 한권씩 책을 읽고 신문(<스포츠경향>)에 연재를 시작했어요.”

그가 읽은 책들은 최인훈의 <광장>과 이청준의 <축제>, 파울루 코엘류의 <불륜> 등 유명 소설뿐 아니라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 조지 오웰의 <1984>,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 안은별의 , 세월호 참사에 관한 <금요일엔 돌아오렴>, 하루카 요코의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미나미노 다다하루의 <팬티 바르게 개는 법>, 전창훈의 <엔지니어의 생각하는 즐거움>, 정소연의 <그림을 걸다 창을 내다> 등 역사, 사회, 과학, 예술 분야 등 매우 다양하다.

―책들이 매우 다양한데 어떻게 선정했어요? 누가 골라준 건가요?

“처음엔 김성신씨가 여러 개를 추천해주면 그중에 제가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쓰는 식이었는데 나중에는 제가 서점에 가서 골랐죠. 책을 만들면서 출판사 편집자와 상의해 고른 책도 있고요.”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뭐였어요?

“<전태일 평전>(조영래)과 <소년이 온다>(한강)였어요. 솔직히 저는 부끄럽지만 전태일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편집자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해서 봤는데 가장 가슴이 먹먹했고, 속에서 무언가가 콱 올라왔어요. 남한에서 민주주의가 현실화되기까지 이런 분들의 공적과 희생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죠.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에 대한 얘기잖아요. 한국에 와서 제가 제일 궁금했던 부분이 광주 5·18과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였어요. 초기에 전라도에 강의를 가서 북한식으로 ‘광주 폭동’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어떤 분이 강의가 끝나자마자 일어서서 ‘김 선생님, 폭동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때 뭔가 정통을 찔린 느낌이었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몰랐어요. 북한군 개입설 등도 나오고 해서 한동안 5·18 문제는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가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광주의 희생을 알게 됐어요.”

―처음 한국에 와서는 영화 보느라고 책을 안 봤다고요?

“네. 계기가 있었죠. 제가 북한에서 단편소설을 4편 정도 발표한 작가였다는 것을 알고,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작가모임에서 초대를 했어요. 저는 이 동네 문단을 잘 모르니까 그냥 순수한 문학인 단체로 생각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보수 진영 작가만 모인 곳이더군요. 그쪽에서 세미나에서 발표할 평론을 저보고 써달라고 했어요. 저는 북한식으로 ‘몇쪽 몇번째 단락의 표현은 잘못이다’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비판했어요. 북한 말도 잘 모른 채 함경도와 평안도 말을 짬뽕해서 쓴 글을 보고 그런 것을 지적했거든요. 초고를 본 사무국장이 전화를 해서 대뜸 하는 첫마디가 ‘김 선생님, 어쩌면 그렇게 우리 보수 작가들의 작품은 까고 좌파 작품은 옹호합니까!’였어요. 그래서 ‘누가 좌파예요? 누가 보수예요?’ 물으니까 황석영 선생님의 <바리데기>와 정도상 선생님의 <찔레꽃>은 좌파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가장 감명있게 읽었던 책인데 말이죠. 이분들은 북한이나 탈북민을 소재로 하더라도 안 가봐서 모르는 부분은 언급을 하지 않아요. 그게 진솔한 거죠. 그래서 제가 ‘대한민국 문단은 색깔이 안 입혀진 줄 알았더니 이렇습니까? 이렇게 편 가르기를 할 거면 저는 안 합니다’ 하고 평론을 안 썼어요. 한 소설가단체도 들어야 되는 줄 알고 들었는데 매해 단체 대표 선거 때마다 문자와 전화 운동이 극성인 게 싫더라고요. 그런 것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동안 글을 멀리하고 영화를 많이 봤죠.”

재일동포 탈북작가 김주성(왼쪽)씨가 지난 13일 오후 서울 혜화동 <배나티브이> 스튜디오에서 북한이탈주민과 방송 녹화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북한에서 입은 생각 닫는 뚜껑”

김주성은 1963년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간 할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해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북한과 연결된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반면에 아버지는 일본 사회의 차별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는 바람에 다른 가족과 사이가 안 좋았다. 아버지의 방황을 견디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김주성을 낳은 지 얼마 안 돼 아버지와 헤어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란 김주성은 총련계 조선학교에 다니다가 1979년 16살에 북송선을 탔다.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계속된 북송 사업으로 재일동포와 일본인 아내 등 약 9만3천명이 북한으로 갔다.

―북송선을 탈 때 아버지는 반대했다면서요?

“할아버지는 유일한 손자인 저한테 북한에 같이 가자고 하고, 아버지는 가지 말라고 강하게 말렸어요. 결국 제 선택에 맡겨졌는데 어릴 때부터 정이 든 할아버지 쪽을 따랐어요. 또 차별 없는 고국을 찾아간다는 기대감도 컸었고요. 떠날 때 학교에서 대대적인 환송행사를 해줬는데, 친구들은 그런 저를 다 부러워했죠. 니가타에서 배가 떠나기 직전 아버지가 호텔로 전화를 해서 ‘곡창지대인 남한도 못사는데 농사지을 땅이 적은 북한이 잘산다는 게 말이 되느냐. 다시 생각해봐라’면서 마지막으로 제 마음을 돌리려고 했어요. 저는 가봐서 아니다 싶으면 밀항을 해서라도 다시 돌아오면 된다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철이 없었고 순진했죠.”

‘조센징’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이 싫어서 간 북한은 어린 김주성이 생각했던 곳과는 딴판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쪽발이’(일본 사람을 비하한 말), ‘째포’(재일동포를 얕잡아 부른 속어)라고 놀렸으며, 심지어는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기도 했다. 평양에 간 지 1년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할머니마저 숨지자 김주성의 삶은 더 고단해졌다. 1960년대에 북송선을 탔던 큰아버지가 보호자로 나섰지만 일본의 이모나 외삼촌 등 친척들이 김주성에게 보내는 생활비 등을 챙기기만 할 뿐 조카를 돌보지 않았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도 힘들었다. 북한에 먼저 왔던 재일동포들이 그에게 “이 땅에서 입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덮어두기 위한 뚜껑이라고 생각해”라며 늘 입조심을 강조했다.

오갈 데 없는 그는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운동(배구) 소질이 큰 도움이 됐다. 국가 체육단 생활을 핑계로 큰아버지 집을 나왔으며, 사범대(진명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청진경공업대학의 체육 교수가 됐다. 배구 선수 특례입학을 놓고 학장과 다툰 끝에 학교 일을 관두고 작가동맹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창작 및 경리직원’이라는 직함으로 작가들의 월급 관리 등 행정적인 잡무를 주로 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직작가(직업이 따로 있으면서 글을 쓰는 작가. 전업작가는 현업작가)가 됐다. 탈출하기 전까지 그가 쓴 4편의 단편소설이 작가동맹 기관지에 실렸다.

―배구 선수 등 글 쓰는 일하고는 거리가 있는 일을 했는데 언제부터 작가를 꿈꿨나요?

“아버지가 대학을 중퇴했지만 책을 좋아했어요. 그 유전자를 받았는지 저도 어릴 때부터 책을 엄청 좋아했어요. 북한 큰아버지 집에서 1년 반가량 있을 때 마음을 달래려고 그림도 그리고 기타도 쳤는데 위로가 안 됐어요. 그때 유일하게 위로가 됐던 게 글을 쓰는 것이었어요. 그때 뭘 썼냐면 일본에서 봤던 영화, 예를 들면 이소룡(리샤오룽) 영화 등을 생각하면서 스토리를 그대로 적기 시작하다가 저를 주인공으로 해서 새로운 얘기를 만들곤 했어요. 국가의 통제된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지요. 그 습관이 계속돼서 대학 교원을 할 때도 혼자 단편을 하나 썼어요. 그렇게 간간이 쓰던 버릇 때문에 작가가 된 셈이죠.”

―그 뒤에 신분 상승을 위해 당원 자격을 딴 뒤 국가과학원에 들어갔죠. 로비를 해서 들어갔다고요.(웃음)

“그쪽 일이 편하고 대접을 잘 받기에 로비를 했죠. 북한은 업무 현장에서는 담당자의 권한이 커서 담당한테만 잘 보이면 대개는 잘 풀려요. 대학교수가 될 때는 당시 여의봉이나 마찬가지였던 일제 손목시계를 줬어요. 국가과학원에 갈 때는 장마당 등 시장화가 활성화되기 시작할 때여서 의외로 담배가 잘 먹혔어요. 영국산 외제 담배 서너 막대기(보루)를 조직부 간부한테 찔러줬죠. 일본에서 보내준 물건이 있었으니까요.”

―탈북의 계기는 뭐였어요?

“북한에 있을 때 남한 방송 등을 보면서 탈북자의 존재 등을 알았지만, 가족들도 있고 하니까 그때는 탈북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죠. 2006년 사업차 중국에 갔는데 거기서 넓은 세상을 눈으로 보면서 북한을 떠날 결심을 했어요. 이듬해 5월 준비를 갖춰 압록강을 넘어 탈북했는데 연길(옌지)의 중국인 집에서 중국 공안한테 잡혀서 그 집에 있던 다른 탈북자와 함께 북한으로 송환됐죠. 조사를 거쳐 보위부 감옥에 갔는데 영양실조에 걸려 몸무게가 40㎏으로 줄었어요.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거기서도 돈을 써서 6개월 만에 풀려났어요.”

그는 감옥에서 사귀었던 친구와 함께 2차 탈출을 시도했다. 두만강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죽을 뻔했지만 2008년 1월 중국 땅에 무사히 닿았다. 김주성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일본으로 가려고 했다. 일본영사관은 도쿄의 어머니에게 아들의 귀향 의사를 알렸다. 이미 작고한 아버지 대신 유일한 법적 보호자였던 어머니는 그의 귀환을 거부했다. 한국영사관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아들을 어머니가 안 받겠다고 한 게 한국적인 정서로는 납득이 잘 안 되는데요.

“워낙 일찍 헤어져 엄마 이름은 고사하고 얼굴도 오랫동안 몰랐어요. 대학 교원으로 발령받을 때 가족 신원조회를 하면서 어머니가 재혼해서 도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뒤 엄마가 그리워서 ‘어머니, 제가 살아서 북한에 와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쓰면서 연락을 주고받았죠. 어머니가 우리 아이들 기저귀나 이유식 등 생필품을 많이 보내줬는데, 북한 실정을 잘 몰라서 제가 물건을 요구하면 ‘마흔 넘은 놈이 웬 돈타령을 하느냐’고 타박을 자주 하셨다고 해요. 탈북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일본에서 보내주는 지원비가 있는데다 열심히 일하면 거기서도 먹고살 만할 텐데 왜 나왔나’라고 했다고 해요. 그런 차에 탈북을 도와준 브로커가 돈을 더 받아내려고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10만엔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젊었을 때 남편한테 당했던 여러 악몽이 있는데 뒤늦게 나타난 자식이 돈부터 요구하니까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는 어머니로서는 이런 식이면 감당 못 하겠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지금은 오해가 다 풀렸어요.”

2008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온 김주성씨는 각종 방송에 출연해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해왔다. 사진은 지난해 <국방티브이>의 <주간클릭! 북한은 지금>의 녹화 방송 장면. 김주성씨 제공

“탈북자들도 피해의식 버려야”

45살 때인 2008년 4월 한국에 도착한 그는 하나원을 거쳐 남한 사회에 홀로 떨궈졌다. 작은 것부터 해나가자는 생각에서 ‘목돈 100만원 모으기 운동’부터 시작했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돈을 베개 삼아 잤을 정도로 스스로 감격했다. 당시 막 출범한 종편 채널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탈북자 프로그램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채널A)와 <모란봉 클럽>(티브이조선)에 출연해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그때도 다른 출연자들과 달리 객관적으로 북한 얘기를 전했다. 북한이나 탈북자와 관련해서는 요즘도 <국방티브이>와 유튜브 방송인 <배나티브이>에서 활동하고 있다. 북한의 부인과 이혼한 뒤 한국에서 다른 탈북 여성을 만나 새 가정을 꾸렸으며 늦둥이 딸(6살)이 하나 있다.

―한국 생활을 한 지 벌써 12년이 됐는데 생활은 어떠세요?

“작은 근심이 없는 게 아니지만 되게 재밌어요. 북한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자유로워서 좋아요. 근심은 한국 사람처럼 삶의 질이 올라가다 보니까 생기는 거고요. 예를 들면 집이에요. 임대아파트에서 시작해서 열심히 벌어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를 마련하고 차도 샀어요. 기분은 좋았는데 그 순간부터 이렇게 빚을 내서 굳이 해야 하는가 후회를 하는 것이죠. 근데 살다 보니까 한국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더라고요. 새 가정과 사랑스러운 딸내미가 생겨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한국에서 탈북자로서 차별을 받거나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아요?

“저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탈북민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하나원에서 출소해서 뭘 가장 먹고 싶냐고 했을 때 저는 초밥과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어요. 어릴 때 일본에서 접했던 거니까 그런 게 자연스러웠죠. 한국 사람들과 문화적 경계를 두지 않아서였는지 저는 차별을 별로 못 느꼈어요. 그러나 한국인들이 탈북자들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에는 문제가 많죠. ‘북에서 왔으니까 얻어먹을 줄만 안다’라든가 ‘우리 세금으로 너네 먹여 살린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듣는데 이 말이 가장 듣기 싫어요. 탈북자들도 이 땅에 같이 살면서 세금을 내는 등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할 바를 다 하고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기초생활수급을 하다 지금은 세금을 낸 지가 10년이 넘었어요. 같은 국민으로 탈북자들을 봐주면 좋겠어요. 우리 탈북자들도 스스로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았으면 해요.”

―무슨 의미인지요?

“약자여서 그렇겠지만 탈북자들은 스스로 위축되고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보다가 서로 얼굴을 쳐다볼 때가 있잖아요. 그럴 경우 한국 사람들은 별생각을 하지 않는데 탈북자들은 자기를 이상하게 쳐다본다고 여겨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 당당하라고 저는 탈북자들한테 늘 얘기해요.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살아보니까 이 속에 다문화가정 등 여러 경계인들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탈북자들은 다문화 출신보다 더 우위에 있어요. 그래서 탈북민들 일부가 차별을 느끼는 것은 아직 본인이 정착하는 과정에서의 미숙함이라고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실제로 저처럼 생각하는 탈북민이 많아요. 탈북민이 한국에서 살게 된 지 20년 이상 되면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도 계시고, 공무원과 변호사, 한국은행 직원 등 각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많아요.”

‘탈북자는 보수 편 돼야’ 교육받아
살다 보니 왜곡·편향 깨닫게 돼
전태일과 5·18의 민주화에 숙연

인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작가 취재로 북한 일상 잘 담아
“젊은 탈북자, 석박사·유학파도 많아
기성세대와 완전히 생각 달라”

지난해 <티브이조선>의 <모란봉클럽>에 가족과 함께 출연한 김주성씨가 방송 직전 엠시인 오현경(의자에 앉은 이)씨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주성씨 제공

“우파 좋고, 좌파 나쁘다”는 MB 하나원의 교육

김주성의 책에는 삼겹살 고깃집에서 다른 탈북자와 나눈 대화 한 토막이 나온다. 다른 탈북자가 “보수는 뭐고 진보는 뭐예요?”라고 묻자, 김주성은 “북한을 부수자와 고치자의 차이일 거예요. 아니면 싸우자와 친하자인지도 모르고요. 삼겹살이나 빨리 드세요”라고 답한다. 그는 이어 “그날 나는 어느 편도 아닌 삼겹살 편이었다”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의 진보-보수 진영 논리와 대립에는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 대립은 선생님이 한국에 왔을 때부터 있었을 텐데요.

“북한은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개념조차 없기에 처음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죠. 이명박 정부 때 왔는데 이 사회는 보수 정권만 있는 줄 알았고, 보수가 정론인 줄 알았어요. 그때 하나원에서 교육받을 때 좌파는 다 나쁘고, 탈북민은 우파를 지지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래서 거리에서 김일성, 김정일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국방부 앞에서 소리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살게 되면서 그런 제가 허무해지기 시작했어요. 이런다고 북한이 바뀌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북한 인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없앨 수 있냐는 의문이 들었어요.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보니까 김대중 정부 때 생각이 나더군요. 그때 평양이 완전히 많이 바뀌었거든요. 퍼주기니 뭐니 해도 그때 북한 사람들의 남한에 대한 인식이 가장 많이 바뀌었거든요. 개성공단 등 남북 교류를 통해 북한 변화를 이끌어냈으면 좋겠어요.”

―당시 하나원의 교육 수준이 놀랍군요. 백지상태에서 처음 주입받은 교육에 지배받기 쉬운데 어떻게 그런 사고 틀을 벗어날 수 있었어요?

“한번은 동네에서 탈북민들이 좋은 일 하자고 해서 방범대에 자원봉사를 나갔어요. 방범대장한테 ‘대장님은 진보, 보수 중 어느 편이에요?’라고 물었더니 자기는 ‘진보가 됐다가 보수가 됐다가 한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 ‘왜요?’라고 하니까 ‘동네에서는 일 잘하면 그게 최고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경기도 광명시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갔어요. 복지관 카페의 아주머니가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그분이 탈북민이었고, 그 외에도 도서관 사서와 사회복지과 직원 2명 등 여러 명의 탈북자들이 일하고 있더라고요. 여기 진짜 대박이다 싶어서 이 지역 시장과 국회의원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민주당 소속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민주당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면서요?’라고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는 ‘당은 상관없어요.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요’라고 하더군요. 제 생각이 바뀐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그 뒤에 대학과 대학원에 가서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처음 교육받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죠. 그때부터 양쪽을 다시 보기 시작했죠. 그런데 양쪽이 서로 너무 대립하고 싸우니까 양쪽 다 싫어진 거죠.”

김주성은 탈북자 정착을 돕는 일을 많이 한다. 특히 젊은 세대를 돕는다. 그들에게 장학금을 연결해주기도 하며, 전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탈북 청소년과 전문 연주가들이 함께 했던 ‘코리아라딕스오케스트라’(2017년 2월 창단)가 대표적이다. 2017년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넘어올 때 총상을 입었던 오청성을 한동안 자신의 집에서 양아들처럼 돌보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탈북자 사회도 이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얘기하면 탈북민 사회에서는 좌파로 찍히지 않을까요?

“글쎄요. 아마 누군가는 좌파라고 할지 모르죠. 그러나 저도 북한 주민이 아니라 북한 당국의 행태가 싫어요. 그러니 저를 그런 식으로 핍박한다면 그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첨예화돼 있는 진영 논리에 매몰된 거라고 봐요. 그런 게 싫은 거죠. 탈북민 운동권분들이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좋지만 활동 폭이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이분들이 사회단체로서 한국의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했다는 얘기는 한번도 못 들었어요.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탈북민 가운데는 대한민국한테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이젠 우리도 베풀어야 한다며 봉사활동 하는 분들이 많아요. 탈북민 운동권 단체도 이런 일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다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않겠어요? 그런 건 없이 국내 정치적인 부분에만 목소리를 높이다 보니 탈북민 채팅방에서는 이들에 대해 ‘너희가 뭔데 우리 3만 탈북민을 대표하나’라거나 ‘모금된 기금의 내역을 투명하게 공표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탈북자 사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얘기군요.

“네. 다른 움직임이 있죠. 예를 들면 개인 자영업을 해서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양로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해요. 한국 사회에 순수하게 기여를 하는 거죠. 제가 아는 한의사분은 자기 지역에 사는 탈북민들에게 기초생활비 50만원씩을 정기적으로 주고 있어요. 이런 움직임이 밑에서 올라오고 있어요. 특히 젊은 탈북민들은 생각이 기성세대와 달라요. 지금 벌써 탈북자 출신 석박사도 많고, 미국과 영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차츰 나아질 거라고 봐요.”

<사랑의 불시착>과 북한의 일상

―앞으로 계획은요?

“책을 쓰고 보니까 집필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원래 소설가거든요. 소설 시놉시스는 이미 5년 전에 써둔 것이 있는데 생활에 치이다 보니 앉아서 글을 쓸 여력이 없어요. 이걸 어떻게든 극복해서 2~3년 안으로 출간을 하려고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tvN)이 요즈음 화제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북한에 불시착한 남쪽 여성이 북쪽 남성을 만나 사랑을 엮어가는 이야기도 재밌지만 시청자들은 북한 사회의 모습에 신기해한다. 그러나 드라마 속 북한의 일상은 작가가 많은 탈북민들을 취재해서 쓴 실제 모습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북한을 잘 모르고 있다. 3만3천여명(2019년 9월)의 탈북민들이 이미 우리 이웃으로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 김주성이 말했다. “<한겨레>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깜짝 놀랐어요. 한국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오해가 많듯이, 탈북민들도 진보 쪽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편견을 깨는 계기가 돼 좋았어요. 고마워요.” 탈북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이었지만, 기자에게는 분발을 촉구하는 질책으로 들렸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이유진

▶김종철: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현재는 토요판팀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국가나 사회, 민족 등 추상적인 단어보다 그 실질을 이루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김종철의 여기’는 4주에 한 번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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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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