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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19 19:39 수정 : 2018.04.19 21:57

[짬]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경은 사무처장

이경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

이경은 고려대 인권센터 연구교수는 잘나가던 여성 공직자였다. 행정고시 38회 동기 가운데 처음으로 중앙부처 과장 자리에 올랐다. 1995년 옛 공보처 사무관으로 공직에 들어온 뒤 청소년위원회 청소년성보호과장과 보건복지부 국제협력과장, 아동복지정책과장, 건강증진과장, 기초의료보장과장 등의 보직을 거쳤다. 청소년성보호과장 때는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를, 건강증진과장 때는 담뱃값 인상을 일선에서 이끌었다. 이런 그가 갑자기 지난해 2월 ‘공무원’을 그만뒀다. 공직 입문 22년 만이었다. 최근엔 세계 최대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에 뽑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13일 서울 안국역 근처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이 처장을 만나 관료에서 엔지오(NGO) 활동가로 인생 항로를 바꾼 사연 등을 들었다.

“이젠 ‘테마가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공무원은 자리’잖아요. 자리를 계속 옮겨 다니죠. 일보다는 어떤 자리로 가느냐가 중요하더라고요.”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제너럴리스트(여러 분야의 지식을 갖춘 사람)의 삶 대신 스페셜리스트(전문가)로 살기 위해 관료 생활을 접었다는 얘기다.

사표를 쓸 시점 그는 박사 타이틀을 얻었다. 서울대 법대에서 ‘아동권리의 국제법적 보호’를 주제로 학위를 받았다. 그가 아동복지정책과장에 있던 2013년 아동입양에 관한 획기적인 법제가 마련됐다. 아동입양의 최종 결정권을 가정법원에서 내리도록 한 것이다. 1989년 체결된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국제입양은 사적인 기관이 맡아선 안 되고 국가기관의 책임 아래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아동권리에 대한 국제인권 규범이 이 땅에 스며드는 데 24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유럽에선 사적 입양이 1960년대부터 금지됐어요. ‘입양인 추방’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한국 정부가 너무 허술하게 입양을 사적인 기관에 맡겼기 때문이죠. 입양은 국제인권 이슈에서 여전히 한국이 몸통입니다.” 아동입양은 권리와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정부는 지금도 복지서비스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했다.

그가 공직에서 경험한 아동인권 현실은 이후 ‘삶의 테마’로 이어졌다. 바로 인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제인권 규범과 한국 현실과의 격차 줄이기’다. “박사 공부는 제가 공직 생활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버팀목이었죠. 박사를 딴 뒤 국제인권법 규범의 이행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맘먹었어요.”

지난해 22년 공직 마감 뒤 학계로
이달 최대 인권단체 활동가 변신
복지부 때 입양아 권리보호 힘써
서울대에서 아동입양 주제로 박사 따

“국제관계 배우러 외국 학생 많이 와
법·제도 세부의 차별 요소 없애야”

그가 보기에 국제인권법 이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기본법제를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었다. “한국도 비준한 유엔 아동권리협약을 보면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사법적 절차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요. 아동에게도 소송의 권리를 줘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법제 마련을 위해선 법무부를 비롯해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이런 얘기도 했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아직 완성된 게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을 이루는 아동과 여성이 각각 개별적으로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기본 법률을 바꿔야 해요. 하지만 정부는 지난해에도 유엔으로부터 국제인권 규범의 미이행 사항에 대해 수많은 지적을 받았어요.”

지난해엔 <프레시안>의 ‘한국 해외입양 65년' 기획 보도에 전문가로 참여해 국제앰네스티 언론상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92년 통신사 <연합뉴스>에 합격해 몇개월 다녔어요. 수상 소식을 듣고 언론사 동기들이 그러더군요. 20년 이상 기자를 한 자기들도 못 받은 상을 받았다고요. 미국에서 추방당한 입양아가 자살한 사건을 보면서 이런 문제를 가능하게 한 법제상의 문제를 짚어보자고 제가 언론사에 기획 보도를 제안했어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인 1972년 설립됐다. 풍자시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에 대한 정권 탄압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독재 치하에서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 구실을 한 한국 지부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다시 바빠졌다. 국제앰네스티 조사관이 한국을 찾아 촛불집회와 용산참사 때 경찰의 과도한 무력 사용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 이후 회원이 크게 늘어 재정 자립도 이뤘다. “현재 후원 회원은 1만4천명 수준입니다. 2013년엔 실질적인 재정 자립의 면모를 갖췄죠.” 국제앰네스티는 독립적 활동을 위해 정부와 기업 후원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가 이끄는 사무처 활동가는 22명이다. 이번 처장 공채엔 10여명이 응모했단다. 사무처 운영 구상을 묻자 조심스럽게 이런 답을 내놓았다. “한국지부는 회원들이 직접 이사를 선출합니다. 두달에 한번씩 열리는 이사회에서 한국지부의 중요한 정책 사항을 결정하죠.”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국제앰네스티의 모토 가운데 저에게 가장 다가온 게 ‘테이크 인저스티스 퍼스널리’(take injustice personally)입니다. 불의를 보고 마치 자기 일처럼 분노하라는 얘기죠.”

지난해 하반기엔 고려대 인권센터 연구교수로 채용돼 국제대학원에서 특강을 해왔다. 한국지부 일을 하면서 강의도 병행할 계획이다. “외국 학생들이 국제관계를 배우러 한국에 많이 옵니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국제기준을 알려주려면 한국이 제대로 된 역량이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죠. 인권은 곧 ‘차별 금지’입니다. 법과 제도 세부에 산재한 차별적 요소를 없애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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