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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4 07:14 수정 : 2006.03.27 16:18

[사형제에 사형선고를] 1. 사형수 마지막 모습

사형수 ㅇ아무개씨를 만나러 간 이른 아침, 서울구치소 앞마당엔 아직 잔설이 드문드문 엎드려 있었다.

접견실 앞에는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의 청년들부터 얼굴에 수심 깊은 초로의 부인까지, 움츠린 어깨로 저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개 사형수에게는 기다리는 가족조차 없다.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ㅇ씨는 예외적인 경우다. 그것은 행복일 수도, 번뇌일 수도 있다.

“얼마 전 딸애가 처음 면회 와서 만날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10년 만에 다 커서 보니 내 딸이 맞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어릴 적 모습이 보이데요. 답답하고 눈물도 났습니다. 애들한테 못 해준게 ….”

마약에 취해 휘두른 칼…용서받지 못할 ‘빨간색 수번’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과의 대면
기다리는 가족이 행복이자 번뇌로

투명창 건너편에 앉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하루를 염불과 기도로 시작해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 빼곤 불경과 관련 서적에 매달리는 그였지만, 혈육에는 마음이 흐트러지는 듯했다.


경기도 한 도시에 살고 있는 그의 부인은 10년이 넘도록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사실을 ㅇ씨는 알지 못한다. 형이 확정된 뒤 그는 가족들을 위해 이혼을 서둘렀고, 부인은 그에게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ㅇ씨와 자매결연을 맺은 교정위원이 얼마 전 찾아갔을 때, 부인은 “그 사람 나오면 뭘 하겠어요. 나라도 돈 벌어둬야지”라고 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더라도 20년은 더 있어야 가석방을 기대할 수 있으니, 만에 하나 그가 나오더라도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될 터다.

그래도 가족들이 기다리는 건 좋은 남편이요 아빠였던 기억 때문이다. ㅇ씨의 장모는 “착하고 마음 여린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아직도 안 믿어진다”고 했다. 부인과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도 좋은 추억만 이야기한다고 한다. ㅇ씨는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렸고, 공장이 문을 닫은 뒤엔 포장마차까지 차려 살아보려고 했던 성실한 가장이었다. 18살에 시집왔다는 부인은 교정위원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해도 그 사람과 비교가 돼 못 해요. 그 사람 잘 생겼잖아요.”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비록 남편을 용서했다고는 해도, 세상이 남편을 용서할 때까지는 부인 또한 죄인으로 산다. 부인은 끝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부인의 말대로, 그는 잘생긴 편이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 단정하게 깎은 머리. 자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조용히 웃었다. 치통을 앓고 있다던데 그런 내색도 없었다. 모처럼 만난 고향 친구같이 선선한 인상 탓에, 왼쪽 가슴에 달린 빨간색 수번이 덜 도드라져 보였다. 사형수를 뜻하는 색깔이다.

“피해자들이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음에도 칼로 … 찌르고 … 넘어져 있는 피해자를 재차 찔러 두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 버리는 등 그 수법이 극히 잔인한 점 ….”(1심 판결문 중에서)

돈이 든 가방을 뺐으러 갔다가 자신이 없어 돌아온 ㅇ씨 일행은 히로뽕과 대마초의 힘을 빌려 결국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을 위해 일부러 마약에 취한 것이기 때문에 감형 사유가 되지 않았다. 3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초범인 ㅇ씨도 사형을 면하지 못했다.

“포장마차에 자주 놀러오던 공범들과 어울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될 사람이 아니었다”고 교화위원은 말했다. 서울구치소 안에서도 ㅇ씨는 모범수로 꼽힌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후회나 참회의 단계를 이미 넘선 듯했다. 1997년 그가 사형수가 된 뒤 한차례 사형집행이 있었다. 그는 “그때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느낀 건 아마도 코앞까지 다가왔다 돌아간 ‘죽음’이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사형이 집행될 때마다 그는 거푸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언젠가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그래도 그는 “사형제가 있으나 없으나 저한테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요즘 그는 <무심>이란 책을 읽고 있다고 한다. “살자고 매달리면,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면, 이미 자살이라도 했겠지요. 그걸 초월한 사람들이 아니면 사형수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교화위원의 설명처럼, ㅇ씨는 가족들로부터 용서받고 가끔 만날 수만 있다면, 언제 형장으로 인도돼야 할지 모르는 그 곳의 삶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짧은 접견이 끝난 뒤 그는 투명창 너머에서 조용히 합장을 하고 일어섰다. 그가 사라진 철문 뒤엔 잔설 같은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 양지바른 인덕원 지하철 입구 옆 화단에선 들잔디 몇 포기가 가까스로 새 잎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른봄 햇살을 받아 풀빛이 눈부셨다. 박용현 기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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