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선진대안포럼 1부 대안을 향한 성찰 ④ 박정희, 넘어서야 할 신화
〈한겨레〉 선진대안포럼이 박정희 문제를 다뤘다. 친일 논란, 군부독재 등 정치적 의제는 과감히 제외했다. 대신 개발독재로 대표되는 박정희 시대의 사회경제 체제에 집중했다. 박정희 신드롬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정희 체제’가 현재 한국 사회에 끼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격론이 오갔다.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진보적으로 전환시키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발제를 맡았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승일 대안연대 정책위원이 토론자로 참석했고, 해외에 머물고 있는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서면으로 의견을 보내왔다. ‘친자본’등 유리한 면만 뽑아 부활 시도 박정희 되살리는 보수 ‘이중잣대’ 왜 박정희가 문제인가. 보수세력이 박정희를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선진대안포럼 참석자들은 최근 한국 보수세력이 박정희를 다루는 방식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보수세력이 ‘어떤 박정희’를 불러내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체제의 복합적 성격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 교수는 “시장·자본에 대한 국가의 대내외적 통제·규율의 측면은 불러내지 않으면서, 성장제일주의를 추구한 정권이 자본을 특권적으로 지원한 대목만 불러내는 것이 보수세력”이라고 분석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교수는 “‘비자유주의적 개발자본주의를 추구한 박정희는 비록 자신의 딸이라 하더라도 시장주의를 내세운 현재 한국 보수세력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짚었다. 국가주의의 상징을 불러내어 시장주의를 부추기는 교묘한 ‘이중잣대’가 작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도 “박정희 모델이 갖고 있는 객관적·역사적 성격과 최근 보수담론이 부활시키는 박정희는 다르다”고 말했다. “박정희주의자들은 과거의 국가주의적 친시장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친시장주의로 변신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친시장주의만 계승하는 선택적 방식으로 박정희를 부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한국의 보수세력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려면 국가주의의 상징인 박정희를 내세울 게 아니라 오히려 묻어야 한다”고 우회적인 충고를 내놓기도 했다. 박정희를 국가주의와 시장주의의 결합 속에서 재생시킨 근본 배경에는 보수세력의 위기감이 놓여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민주화 세력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려는 보수 세력의 움직임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문제는 아직까지도 한국의 보수 이데올로기가 자유주의와 반공이데올로기, 국가주의 사이에서 서로 충돌하며 착종되고 있다는 것”이라며 “박정희 신드롬도 한국 보수 이데올로기의 이런 착종된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재벌통제 실패로 ‘시장독재’ 불러 민주정부 무능이 자초한 신드롬 박정희의 부활은 문민정부 이래 민주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참석자들은 이 대목을 더 날카롭게 비판했다. 민주정부의 무능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박정희 신드롬의 바탕에는 민주화 세력의 정책적 실패와 무능력이 있다.”(신광영 중앙대 교수) “무능한 민주세력이 박정희 부활의 정치적·지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민주정부의 정책적 실패의 핵심에 대해선 재벌을 중심으로 한 시장주의의 문제가 지적됐다. 신광영 교수는 “민주화를 통해 독재권력은 약화됐지만, 독재권력 아래서 탄생한 재벌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민주정부 아래서 만들어지지 못했다”며 재벌통제의 실패에 초점을 맞췄다. 정승일 대안연대 정책위원은 “‘개발독재’를 척결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도입한 ‘시장독재’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특히 “민주정부가 외쳤던 ‘민주적 정상국가’라는 구호는 실제로는 ‘자본’을 정상화시키자는 구호였지, ‘민중의 삶’을 정상화시키자는 구호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 점 때문에 외환위기 직후의 ‘1차 박정희 신드롬’보다 최근의 그것이 더욱 위험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지금과 같은 부실한 민주주의로 박정희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며 “민주정부 나아가 진보세력 전체가 사회경제적 양극화 등을 전향적으로 극복할 ‘실력’이 없다면, 박정희 신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우리 사회구조의 지배적 부분이 박정희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이를 제대로 개혁하지 못했다는 데 민주세력의 핵심적 문제가 있다”며 “현재의 민주세력도 ‘박정희 체계’ 안에 살면서 이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희연 교수는 진보개혁세력의 ‘이중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진보주의적 민주세력은 더욱 급진적인 입장에서 민중들의 삶의 고통에 대한 대안지평을 열어야 하겠지만, 중도자유주의적 민주세력은 무능한 민주주의자를 넘어 유능한 통치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증분석 통해 ‘안티 박정희’ 담론 다양화를 박정희 극복 위한 진보학계 과제 박정희 체제에 대한 진보개혁세력의 혼란스런 대응에는 학계의 책임도 있다. 참석자들은 “박정희 체제를 뭉뚱그려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군사정권·개발독재 등의 단순한 ‘비난’으로는 박정희 체제의 강력한 영향력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병천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는 어렵다”며 “한강의 기적을 낳은 박정희 체제와, 유신·광주학살·외환위기의 원점인 박정희 체제를 모두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신드롬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해서 이를 비판하는 논리까지 ‘이데올로기’에 치우쳐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조희연 교수는 ‘안티 박정희’ 담론의 다양화를 과제로 제시했다. “박정희 모델의 어떤 측면을 진보적으로 전환시키려는 흐름까지 포함해 ‘안티 박정희’ 담론을 더욱 다양화·다원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조 교수는 “새로운 지점에 착목한 연구자 가운데 일부는 실증분석에서 곧바로 반진보주의 또는 보수적 정치적 결론으로 비약해버리는 문제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박정희 비판담론 다양화의 핵심은 ‘고도 성장의 실체’를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일이다. 홍성태 교수는 “지금까지는 주로 노동·민중의 입장에서 성장의 효과를 아예 무시해왔다”며 “사회구조와 생활방식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박정희 시대의 정치경제적 문제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짚었다. 정승일 대안연대 정책위원은 “박정희 시대의 모든 것을 박정희라는 특정 인물·인격과 결부시키면 결국 인격적 영웅주의 또는 인신공격 밖에 남지 않는다”며 “박정희가 취한 은행 국유화, 기업통제, 선별적 산업정책 등이 과연 ‘정치적 독재’의 산물인지 아닌지 나눠 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태균 교수는 △외자 등 ‘막대한 투입’을 감안한 경제성장의 효율성 문제 △한일협정·베트남 전쟁 등 대외 관계와 경제성장의 관계 △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 처리과정 등 재벌-정권의 유착 실상 등에 대해서도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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