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있는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인도의 마가다국 수도 라자가하에 뿐나라는 부잣집 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뿐나는 주인마님의 지시에 따라 밤새도록 쌀을 빻고 있었다. 땀이 줄줄 흘러내려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땀을 식히려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저 멀리 산등성이에 환한 불빛을 받으며 수행자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 뿐나의 눈에 보였다. 무심히 바라보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녀라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느라 잠을 못 자지만, 저 수행자들이야말로 아무런 걱정 근심도 없는 몸인데 왜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일까?’ 다음날 아침, 마을로 탁발하러 내려온 붓다에게 조촐한 아침공양을 올리며 지난밤의 궁금증을 여쭈었다. 붓다는 대답했다. “뿐나여, 그대는 힘들게 일하느라 밤을 새웠지만, 그 수행자들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정진하느라 밤늦도록 잠들지 않았다.” 그리고 붓다는 게송을 읊었다. “언제나 깨어 있고/ 밤낮으로 배우며/ 그 마음을 닙바나(열반)로 향하면/ 번뇌는 사라진다.” 뿐나는 담담히 이 게송을 들었다. 그런데 <담마빠다> 주석서에는 뿐나가 이때 성자의 첫 번째 단계에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노예가 성자가 된 것이다. 뿐나는 세상이 열두 번 바뀌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계급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렇게 계급을 정해놨다고 <리그베다>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 차별에 저항하는 짓일랑은 애초부터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 계급사회 인도의 상식이요 진리였다.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하는 뿐나로서는 당연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런 뿐나가 성자의 첫 번째 단계에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사회적 지위가 덩달아 높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뿐나가 세상의 다른 면을 봤다는 사실이다.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느라 밤을 새우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진리를 추구하느라 밤을 새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뼛속까지 노예였던 그녀에게 이 깨달음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인도 사회가 수천 년 역사의 무게로 그녀를 노예계급으로 내리눌러도 뿐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 순간 뿐나는 자신의 성스러운 가치를 회복했다. 2600년 전 인도 땅의 여자 노예 뿐나는 자신의 가치를 회복했는데,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21세기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가. ‘수저 계급론’이 심각하다. 젊은이들이,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흙수저를 말한다.
이미령(불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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