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깸
학기말은 가르치는 사람도 곤혹스럽다. 학생들의 강의평가 중 성적과 출결에 대한 볼멘소리야 그렇다 쳐도 강의 내용에 대한 것은 매번 쉬이 소화되질 않는다. “하나 마나 한 쓸모없는 이야기의 반복.” 몇날 며칠 머리에서 맴돈 이번 학기말의 한마디다. 취업률과 산학협력 실적이 대학 교육의 질을 가늠하는 가장 주요한 준거가 되어버린 형편이니 인문교양에 대한 학생들의 이 같은 박대를 나무랄 것도 없다. “총장은 결국 돈 끌어오는 자리”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회자될 때면 아예 직업사관학교라고 간판을 내건 대학이 차라리 솔직해 보인다. 교육을 시장에 팔아넘긴 정부가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이를 기준으로 학교를 서열화하겠다는 대목에선 실소마저 잃어버린다. 과거 전통학문이 애지중지하던 단어들, 이를테면 인간애, 공정, 양심 따위의 가치들은 시장논리가 삶의 원리로 내면화된 사회에선 모두 무용한 것들이다. 자본주의가 “그다지 이타적이지 않은 목적에 자본이 투입되는 방식”(페르낭 브로델) 모두를 일컫는 것이라면, 저 낱말들보다 ‘쓸모없는’ 것은 없다. 시장이 집어삼킨 것이 어디 교육뿐일까. 종교의 사정도 딱하다. 세속화된 종교, 이젠 새로울 것도 없다. 이를 과도기의 위기나 진통쯤으로 둘러대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왔다. 수입이 짭짤한 양모 생산을 위해 농사를 짓던 소작인들을 몰아내고 농토를 목양지로 전환하던 수백년 전 영국. ‘유토피아’(토머스 모어)가 그리는 이 차가운 현실 속 “욕심 많고 난폭한 양들”은 우리에게 작품만큼이나 ‘고전’이 되었다. 인격 없는 교육, 가르침 없는 대학, 희생 없는 신앙, 사람 섬기기를 멈춘 종교, 모두 실재를 배반한 도구들, 본성을 거스른 난폭한 양들이다. 유토피아가 묘사하는 다음 대목은 더욱 음울하다. 집과 마을마저 남김없이 먹어치운 들판에 덩그러니 건물 하나만 남았다. 양들의 우리로 쓰기 위한 교회다. 묵시치고는 끔찍하게 사실적이다. 이쯤 되면 차라리 난폭한 양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나앉은 거리가 더 실재의 학교요 종교에 가깝다. 적어도 곤궁한 거기에선 학교나 교회에서 사멸해가는 저 쓸모없는 낱말들, 그것도 오장육부, 살과 피로 이루어진 가장 숭고한 가치,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적어도 그 자리에선 은유나 상징이 아닌 강도 만난 이를 보듬는 진짜 손들을 잡아볼 수 있지 않은가. 자식의 마지막 시간이 여전히 궁금한 부모들의 광장, 삼성 반도체 희생자 가족들이 풀어내는 매일 저녁 역전 길모퉁이의 이야기, 사람답게 사는 것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 해고 노동자들의 팔뚝질. 이보다 실재감 있고 간절한 기도가, 배움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동훈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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