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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0 20:26 수정 : 2015.11.11 10:23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이 제철을 맞은 단풍이 한껏 물이 든 백양사 입구 쌍계루 앞 연못 주변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의 ‘독백’

새벽이다. 항상 거닐던 오솔길이다. 마침 단풍이 제철이다. 전국에서 백양사 단풍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몰린다. 해 뜨기 전인데도 백양사 입구의 연못엔 카메라를 설치하고 빛을 기다리는 이들이 장사진이다. 운문암으로 오르는 오솔길은 언제나 정겹다. 문득 출가했을 때가 떠오른다. 16살이었다. 아버지는 울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고리채에 전답을 날리신 탓이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때가 중학 2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학교에 안 가고 밀밭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애들아! 공부해야 뭐 하니. 일찍부터 돈을 버는 것이 낫다. 우리 돈 벌러 나가자.”

16살 때 무작정 버스 타고 가출
내리고 보니 절, 바로 출가

풋내기시절 관광 온 여학생에 번뇌
환속을 꿈꾸기도

세상은 노력 따라 지옥도 극락도
그래서 세상 바꾸는 일에 투신

6·10항쟁 주도하다 대공분실로
소름 끼치고 공포 엄습

생사는 ‘다반사’라고 떠들었는데
아! 나는 사기꾼이었다

역사에 귀먹고 현실에 눈먼
노회한 자칭 도인은 속인보다 못해

아버지 숨지고 가난 지긋지긋

백양사 뒤의 암자인 운문암으로 오르는 길의 계곡엔 낙엽이 쌓여 있다. 지선 스님은 30년간 서옹 큰스님을 모시는 홍복을 누렸고, 이 계곡길을 함께 오르내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출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주린 배를 한번이라도 채웠으면 했다. 도시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전남 장성군 장성읍에 내리니 백양사 가는 버스가 있었다. 무작정 타고 봤다. 내리니 절이 있었다. 그길로 출가했다. 가출이 곧바로 출가로 이어졌다. 풋내기 사미승 시절 때는 해탈과 번뇌에 대해 밤낮으로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무하고, 가마솥에 밥 짓고, 반찬 만들고 하는 승려의 일과도 힘들었다. 가장 큰 번뇌는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싸우는 일이었다. 당시 관광사찰 백양사에는 수학여행 오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주지 스님은 대부분 절 안내를 나에게 시켰다. 어떤 여학생은 수행여행을 다녀간 뒤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환속을 꿈꾸었다.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서 장에 내다 팔았다. 장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책을 꼭 한 권씩 사 오셨다. 내가 호롱불 아래서 그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길 원했다. 그때 읽은 책들은 <홍길동전>, <전우치전>, <서산, 사명대사>, <원효대사>, <장화홍련전> 등이었다. 대부분 권선징악이었고, 영웅이 세상을 구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세상을 구하고, 민중의 고통에 일일이 화답하고 싶었다. 무책임한 소리, 현실성 없는 관념적인 말을 하지 말기로 했다. 번뇌로부터 해탈하고 위대한 혁명을 꿈꾸었다.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

부처님은 왕자로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버렸다. ‘위대한 버림’이었다. 6년간 고행을 했다. ‘위대한 수행’이었다. 깨달음을 얻고 민중의 삶으로 파고들었다. ‘위대한 회항’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세상은 번뇌로 가득 차 있으니 해탈은 피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은 노력 여하에 따라 지옥도 될 수 있고 극락도 될 수 있다.

말로만, 입으로만, 글자로만…

그래서 세상 바꾸는 일에 뛰어들었다. 외부 모순(업)인 독재정권에 대항한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이었다. 서울 광화문 성공회 성당에서 6·10대회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붙들려 갔다. 눈을 가린 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빨간색으로 도배한 방에는 작은 욕조가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소름이 끼치고, 불안과 공포가 일었다. 죽음이 눈앞에 왔다. 그때 왜 내가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가를 생각했다. 평소 생사는 ‘다반사’라고 설법하며 죽음을 초월한 것같이 행동했는데….

생사는 일여(一如)하고 생사는 본디 없어서 나의 오고 감이 생사와는 무관하다고 도인처럼 떠들며 살아왔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겁에 질리다니 이게 될 말인가! 그때 크게 느꼈다. 아! 나는 사기꾼이었구나. 나는 앵무새였구나. 말로만, 입으로만, 글자로만,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달았고 떠들어댄 것이다. 죄지은 것 없이 옳은 일만 했는데 왜 떨린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은 안정되고, 담담해졌다.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크게 한번 죽어 다시 살아남)이다. 민중민족종교인 불교의 승려들이 전 중생을 위해 역할을 못했으니 그 죄가 무척이나 컸다. 그런데 6·29 항복선언을 국민들이 받아내며 나는 가까스로 살았다. 중생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

앉은 채로 입적한 큰스님의 미소

운문암으로 오르는 길에 고목이 있다. 2003년 앉은 자세로 입적(좌탈입망·坐脫入亡)하신 서옹 큰스님을 모시고 이 길을 오르내릴 때 그분은 항상 이 고목에 걸터앉으셔서 쉬시곤 했다. 한적한 산중에 티없이 맑은 미소로 앉아 계신 모습은 천년 고불(古佛)이나 한 마리 고고한 학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이제 그런 미소를 띨 수 있을까? 큰스님에게 선(禪)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은커녕 더 큰 의심덩어리만 선물하시곤 했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묻는다. “스님은 깨달으셨나요?” 나는 지체 없이 대답한다. “아뇨, 아직 멀었어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러나 깨달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실천이 없고, 관념화·신비화된 언어가 난무한다. 왜 깨달으려고 애쓰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 함께 지은 업보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라는 모든 이들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 이외에 어떤 계급, 어떤 계층을 막론하고 해결해야 할 모순(문제)이 있다. 부처님은 이런 사바세계의 총체적인 문제의식에서 출가하셨고, 성불하셨다. 이런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모든 현상은 원인인 인(因)과 조건인 연(緣)이 상호관계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바른 삶이 깨달음의 목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대승불교의 깨달음은 무의미한 것이다. 주변엔 스스로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 역사의 소리에 귀먹고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멀어 비겁한 침묵을 하고 있는 노회한 자칭 도인(道人)은 속인보다 못한 인물이다. 깨달음은 현실의 모순을 고치는 데 써야 한다. 나는 그러지 못해 괴롭다.

백양사 쌍계루의 연못에 비친 가을 단풍의 모습.
그림자 비치는 연못, 가을이 깊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산에 올라와서 바라보는 백양사는 참 아름답다. 형형색색의 나뭇잎이 백양사를 품고 있다. 다시 진정한 깨달음을 생각해 본다. 현실과 밀착돼 있으며, 현실고(現實苦)에 대해 무한히 부정하고, 무한히 항상 발전해가는 영원한 진리가 깨달음이다. 문득 대학생들이 생각난다. 젊은 시절 많은 대학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독재에 항거하고, 그대들의 삶을 바쳐 이 나라를 갈아엎어야 한다고…. 지금 와서 생각하니 미안하기만 하다. 나도 못 지킬 것을 마구 뱉어낸 셈이다.

나는 종단 개혁에도 힘썼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권력과 자본과 결탁해 마치 종교를 고급 취미 생활처럼 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집착을 없애야 해탈이 온다고 느끼고, 설법하지만 후회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웃어본다. 그리고 읊조린다.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여/ 부처가 되는 일/ 그러나 홀로 가지는 마라/ 거기 부처 되는 자리 없다/ 사람과 함께 울고 웃으며/ 비인간화되어가는/ 세계의 껍질을 깨라/ 부처 되는 자리, 바로 거기다”

백암산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쌍계루의 그림자가 낙엽이 떠다니는 연못에 비친다. 가을이 깊다.

(※지선 백양사 방장과 지난 2일과 3일, 이틀간 인터뷰한 내용을 지선 스님의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장성/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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