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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0 20:24 수정 : 2015.11.10 22:28

쉼과 깸

오늘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무엇보다도 전 지구적으로 스마트폰에 시선을 집중하는 풍경에 적잖이 당황하실 것입니다. 스마트폰에 의존하여 사색보다는 검색에 몰입하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가르침을 내릴지 고민되실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스마트폰은 말할 것도 없고 책도 없었습니다.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세상 이야기(정보)를 접할 수 있었을까요? 단순합니다. 큰 나무 밑이나 강당에 모여 앉아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질의와 토론을 하였습니다. 대면 소통인 셈입니다. 종이와 연필이 없는 시대이니 제자들은 자연스레 그날그날의 말씀을 거듭 새겨 외우고 기억했습니다. 토론이 끝난 뒤에는 명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리된 부처님의 법을 이웃들에게 전하러 길을 나섰습니다.

명상은 부처님의 설법을 떠올리면서 그 내용의 핵심과 의미를 거듭 새기는 방법입니다. 잘 듣고, 잘 기억하고, 잘 떠올리고, 잘 새기는 과정이 바로 명상입니다. 제자들은 나무 아래 앉아서, 혹은 마을로 밥을 얻으러 오가는 길에서 말씀을 떠올리고 새기면서, 생각을 바로잡고 감정과 언행을 순화했던 것입니다.

구전되던 부처님 말씀은 그로부터 몇백년이 흘러 야자수 잎에 철필로 새기게 되었고, 이후 동아시아에서 종이에 기록하여 집대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에도 제자들은 경전을 읽는 한편, 스승의 법문을 듣고 사유하여 내면화하는 명상을 이어갔습니다. 스마트폰이 종이책을 대신하는 지금도 명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명상이 바로 잘 보고 잘 듣고 잘 사유하는 것이라면, 스마트폰을 활용한 명상 수행도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기차나 버스로 이동할 일이 잦은 나는 이 시간에 스마트폰을 이용합니다. 주로 좋은 글들을 불러내어 읽습니다. 한 권의 책 그 이상의 울림이 있는 글입니다.

“히말라야에 사는 토끼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결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 읽은 루이 알튀세르의 글은 자칫 직위와 인격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생생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팟캐스트도 즐겨 듣습니다. 좋은 음악도 듣습니다. 음악 명상입니다. 미국의 밴드인 핑크마티니의 ‘초원의 빛’은 가사가 참 좋습니다.

“푸른 언덕이 있고/ 차는 저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곳/ 낮에는 찬란한 빛으로 넘쳐나고/ 밤에는 수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 세상이 너무 빨리 움직여/ 사는 속도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아/ 우리 머리를 잔디 위에 쉬게 하면서/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을래?”

법인 스님(일지암 암주)
노래를 듣는 동안 풍경이 그려집니다. 잔디가 자라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나의 사유와 감성이 깊어집니다. 의미 있는 것들과 접속하고 내면과 합일하면 그것이 바로 명상 수행입니다. 아무리 편하고 빨라도, 내 정신과 감성의 생기와 울림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일 수 없습니다. 지금 실시간 검색어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실시간으로 우리 행복이 실종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마음으로 바라보는 스마트폰 명상을 권해 봅니다.

법인 스님(일지암 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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