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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2 19:44 수정 : 2019.01.22 22:43

팔순 무렵의 조지송 목사.

영등포산업선교회 초대총무 조지송 목사 별세…향년 87

팔순 무렵의 조지송 목사.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린 조지송 목사가 22일 오전 8시22분께 별세했다. 향년 87.

1933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국전쟁 때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영어를 배웠다. 61년 장신대 야간과 경기대를 졸업하고 63년 예장통합 경기노회에서 한국교회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초대 총무를 맡아 20년간 현장에서 헌신했다. 특히 박정희정권의 탄압에 맞서며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더불어 한국노동운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1961년부터 신학교 3학년 때부터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위원회 실무목사로 취임하기 직전인 64년 2월까지 탄광, 철광, 섬유공장과 중공업 공장에서 노동체험을 했고, 경제·산업·노동·인구문제 등을 파악하기 위해 경제기획원, 상공회의소, 한국노총 등을 오가며 연구와 훈련을 거쳤다. 세계교회협의회(WCC) URM의 주선으로 미국 루스벨트대학에서 산업선교 관련 연수를 받기도 했다.

조 목사는 초기에는 공장에 가서 설교하고, 기숙사에서 성경 공부를 이끌고, 노동자들을 심방하는 등 ‘선교’에 주력했다. 특히 공장 대표들을 대상으로 산업신학, 평신도신학, 성서의 노동관, 노동운동, 경제문제 등을 강의하고, 체육회·음악회 등을 열어 산업전도교육을 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탈농촌 도시 유입이 늘어나면서 그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 선교의 한계’를 절감했다.

지난 2012년 팔순 기념 회고록 구술에서 조 목사는 “노동자들에게는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상 치료비가 더 중요하고, 제때에 받지 못한 체불임금, 퇴직금, 해고, 구타 등이 당면한 문제라는 사실이 가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76년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관을 배경으로 함께한 선교회 활동가들과 여성노동자들. 맨왼쪽 조지송 목사, 뒷줄 스티븐 라벤더 선교사, 맨오른쪽 인명진 목사.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제공
그로부터 노동자 인권 개선에 앞장 선 그는 교단과 공안 당국으로부터 ‘빨갱이 목사’란 음해를 받으며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72년 ‘국가보안 특별조치법’ 발동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그는 소그룹 조직과 운영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는 식으로 운동을 지속했다. 조 목사 개인적으로도 당시의 소그룹 모임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가장 교회다운 모습의 교회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영등포 지역과 경인 지역 100여개 기업에 노동조합을 조직해 4만명의 조합원을 가입시켰다. 71년 제56회 예장 총회는 ‘산업전도’ 대신 공식적으로 ‘도시산업선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유신정권의 탄압에 노조 간부들은 숨고, 교회 내에서도 ‘신앙이 없는 집단’이라며 배척하기 시작했을 때 산업선교회를 지켰던 이들도 소그룹 모임에 참여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해고당하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온갖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불의에 맞서 싸웠다. 조 목사는 평소 “노동자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항거했던 예수의 참 제자들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을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했고, 노동조합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정리했다. 그는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정의했다.

1977년 1월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조지송 목사.
1969년부터 그는 신용조합을 만들어 노동자 주거문제 해결에도 나섰다. 78년 정부 탄압으로 신용조합이 해산된 뒤 만든 ‘다람쥐회’는 지금도 가난한자, 집이 없는자, 서민들을 위한 신용협동운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0년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본교단총회 역사유적지로 선정되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민주화운동기념비도 받았다.

고인은 1982년부터 건강이 악화돼 산업선교 현장을 떠났고 85년 충북 청원으로 옮겨 농사를 짓다 2009년무렵 파킨슨병 치료를 위해 판교에서 투병생활을 해왔다.

지난 2018년 11월 영등포산업선교회 설립 60돌 기념 감사예배에서는 조 목사의 시 ‘바보들의 행진’ 낭송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고인은 후배들이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나설 때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한 일”이라면서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산업선교회를 지탱해 온 이들의 노고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하곤 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추모예배는 22일 오후 8시, 장례예식은 24일 오전 10시 영등포산업선교회관에서 영등포산업선교회장으로 진행한다.

유족은 부인 박길순씨와 성철(재미)·향숙씨 등이 있다. (031)787-1507.

조현 종교전문기자, 김경애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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