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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16 09:50 수정 : 2018.09.16 18:19

[토요판] 인터뷰
‘정의의 길’로 50년 함세웅 신부

▶올해로 사제가 된 지 50년을 맞은 함세웅 신부가 최근 자신의 시대를 증언하는 대담집(<이 땅에 정의를>)을 냈다. 그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1970~80년대 격동의 역사 현장에 늘 서 있었다. 약자와 민중 편에 서왔던 정의구현사제단도 마침 창립 44주년을 앞두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인 함 신부를 지난 12일 오전 서울 원효로 성심수녀원 기념관에서 만났다.

“자본주의를 정화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자본주의의 하수인, 노예로 전락했다.” 함세웅 신부가 지난 13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 교회를 질타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은퇴 뒤에도 꼿꼿한 태도 유지
“자본주의 정화시켜야 할 교회가
맘몬 논리 따라 기업처럼 행동”
“김수환 삶과 가르침 외면한 채
무조건 떠받들며 상품화만 관심”

해방신학 이어 여성신학도 수용
“가부장 말고 모성 신관 수용하면
세상에 평화와 사랑 더 넘칠 것”
“여성사제 허용…미사용어 바꿔야”
길거리 미사는 예수 체험 현장”

1974년 지학순 주교 수감 계기
‘정의구현사제단’ 창립 앞장서고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조율
87년 6월항쟁 도화선에 불붙여

“약자 편이었던 예수와 부처 정신
종교 지도자들이 놓치고 있어”
깨어있는 소수가 변화의 원동력
예언자적 소명 초심 잃지 말아야”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의 통치가 이어지던 시절,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 준 집단 중 하나는 한국 천주교다. 전국의 주요 성당은 군과 경찰의 군홧발에 쫓기는 청년 학생과 갈 곳 없는 노동자, 농민을 품어주는 둥지였으며, 때로는 민주화투쟁의 진지였다. 일반 시민들과 천주교의 이러한 따뜻한 연대는 순전히 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 덕분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7년 6월항쟁 등 역사적 주요 고비마다 사제단이 함께 했다. 사제단의 중심에는 함세웅(76·이하 호칭 생략) 신부가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막후 조율사였던 김정남(76·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이런 함세웅을 가리켜 평소 “민주화운동에서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일 서울 원효로 성심수녀원 기념관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함세웅은 거물연하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존댓말이 아닌 말로는 한번도 답하지 않았다. 인터뷰 전에 마실 것을 묻는 수녀회 성도에게 기자는 커피를 주문했지만, 그는 집에서 들고온 반쯤 남은 물병을 내보이며 사양했다. 최근 나온 한인섭 서울대 교수와의 대담집 <이 땅에 정의를>(창비)에 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함세웅 신부가 지난 12일 서울 원효로 성심수녀원 기념관에서 최근 자신이 펴낸 회고 대담집인 <이 땅에 정의를>에 손을 얹고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사제들의 결단 촉구한 김정남의 편지

┕천주교의 여러 사제들과 얽힌 일화나 비화도 실명으로 책에 많이 나오더라. 좋은 역사 자료가 될 것 같다.

“한 교수와의 대화가 편해서 깊이 있는 얘기를 많이 나눴다. 솔직한 기록을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기억나는 대로 얘기했다.”

┕6년 전인 2012년에 주임신부직을 은퇴했는데 요즘은 어디서 지내나.

“교구에서 마련해준 집(상도동)에서 내적인 평화 속에서 잘 지내고 있다. 아침 7시쯤 일어나서 짧은 기도를 한 뒤에 한시간 정도 동네를 산책하고 집에 와서는 요가를 한다. 아침 미사와 간단한 식사를 마치면 오전에는 개인 시간을 보내고, 사람 만나는 일 등은 주로 오후에 한다.”

함세웅은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 중이던 1968년 6월에 신부가 됐다. 우르바노 대학에서 신학 석사,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73년 6월 귀국했다. 귀국 직후 서울 연희동 성당 보좌신부를 잠시 지낸 뒤 응암동 성당과 한강 성당, 청구동 성당 등에서 주임신부를 역임했다.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천주교 서울교구청의 홍보국장으로 일했다. 홍보국장 시절인 1987년 함세웅은 6월항쟁의 불길을 당기는 역할을 했다.

그해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대공분실(남영동) 조사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자, 경찰은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으로 위장하려고 했다. 양심적인 의사(오연상)와 부검의(황적준), 직업정신에 투철했던 검사(최환)에 의해, 고문치사임이 드러났음에도 경찰은 고문 하수인 2명만 구속하고 사건을 덮었다. 하지만, 그해 5월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됐음을 폭로했다. 이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박종철군 고문에 가담했던 범인이 더 있다는 사실은 당시 고문 경관들과 같은 감옥(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전 국회의원)씨가 알아내 바깥의 김정남씨에게 몰래 전해줌으로써 드러났다. 처음에는 사제들이 안 나서는 것으로 얘기가 되기도 했었는데.

“박종철 사건에 대한 문건을 그해 3월부터 김정남 선생한테 받아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좀 버겁고, 핑계이긴 하지만 당시 교구에서 일하고 있어서 교회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정남 선생이 ‘면책특권이 있는 야당, 김영삼씨의 통일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폭로하기로 했다’고 하더라. 잘 됐다고 안도하고 있는데 어느날 김정남 선생이 ‘야당의원이 못 하겠다고 한다. 그러니 사제단이 맡아줘야겠다’고 다시 연락해왔다. 김수환 추기경한테 얘기했더니 ‘1975년 인혁당 사건 때 8명이 사형당하지 않았느냐, 잘못하면 이번에도 정권에서 그 경찰관들을 죽이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면서 선뜻 받지 못하시더라. 유현석, 황인철 변호사와 함께 최종 발표문을 준비해 놓았지만, 최종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5월17일 주일을 맞았다.

당시 저는 주일마다 구파발 성당에 가서 미사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고 황숙자)이 김정남 선생 편지를 거기로 가져왔다. 그걸 보니까 이게 구약성서의 요나더라. 우리에게 돌아온 십자가를 피할 수가 없더라. 편지를 없애버려서 원본은 없지만, 지금도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전두환의 불의한 정권이 망하느냐 않느냐가 여러분 사제의 손에 달렸다. 이것을 공개하면 이 정권은 틀림없이 망한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는 앗시리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의 예언자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앗시리아 도성 니네베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고 했지만, 요나는 엄두가 안 나서 바다로 도망갔고, 그는 결국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하느님께 ‘약속대로 하겠다’고 기도한 뒤 생환했다.

┕그래서 당시 사제단 단장이던 김승훈 신부한테 바로 갔었나?

“미사가 끝나자마자 당시 홍제동 성당으로 김 신부님을 찾아갔다. 편지를 같이 읽고 기도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제가 ‘이번에는 신부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 제 얘기는 일체 하지 마시라, 이번에는 신부님이 감옥가셔야 한다’고 했더니 ‘알아, 알아’라고 하면서 흔쾌히 수락했다.”

┕감옥행을 떠민 셈인데.(웃음)

“우리 사제들은 서로 끈끈하기도 하지만, 그런 시대 명령을 따르느라 고난받는 것은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3·1민주구국선언 사건(1976년) 때 나는 구속됐고, 당신은 불구속된 데 대해 부채감을 늘 갖고 계셨다.”

┕재야에서 활동하던 김정남씨와는 언제부터 알았나.

“1974년 원주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혐의를 뒤집어쓰고 구속됐을 때쯤이었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원주의 신현봉 신부가 시대를 종합할 수 있는 좋은 분이 있다면서 소개해줬다. 그는 항상 뒤에서 활동하면서 민주화운동을 도왔는데 매우 헌신적이었다. 한번은 헌 내복을 많이 구해달라고 해서 모아줬더니 민청학련으로 옥살이 하는 학생들에게 다 들여보내더라. 동년배여서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면서 그에게 우리 역사와 사회에 대해 많이 배웠다.”

“김수환 추기경께 발길 끊은 것 반성”

6월항쟁 때 명동성당은 시위대의 피난처이자 야전본부였다. 집권당인 민정당의 대통령(간접선거) 후보에 노태우가 뽑혔던 6월10일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 도심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에 쫓기자, 이날 밤 명동성당에 몰려갔다. 이때부터 학생·시민들이 자진 해산한 6월15일까지 명동성당은 정국 흐름의 핵이었다. 함세웅은 추기경(김수환)과 함께 경찰의 강제 진압을 포기시키는 한편 시위대의 화염병 제조와 투척을 막음으로써 유혈 충돌을 방지했다.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야전사령관 역할을 했는데 두렵지 않았나?

“그때는 시민 대표와 정부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역을 했기에 두려울 일이 없었다. 동료 사제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잘했다. 서울 교구 소속 사제 200여명이 다 왔는데, 젊은 사제 50~60명은 사복을 입고 왔더라. 왜 사복차림이냐고 물었더니 광주의 비극을 얘기하면서 이번에 만약 당국에서 강제 진압하면 자기들도 잡혀가서 똑같이 고통받겠다, 그래서 시대의 증언자가 되겠다고 하더라. 수녀님들도 수백명이 정복(수녀복)을 입고 시민들의 맨 앞에 서서 방패막이가 됐다. 정말 아름답고 고맙더라.”

함세웅 신부가 1968년 6월 로마에서 아가지니안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있다. 함세웅 신부 제공
로마에 유학 중이던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 김수환 추기경(왼쪽)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함세웅 신부 제공
┕명동성당 농성 이틀째인 6월11일 밤에 안기부 차장(이상연)이 사실상 진압 통보를 하러 왔었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께서 단호히 거부하지 않았나.

“그렇다. 안기부 차장 면담 자리에 추기경이 저랑 당시 교구 사무처장이던 김병도 신부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추기경은 ‘어떤 이유로든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되어선 안 된다. 공권력이 강압적으로 투입되면 제가 맨 앞에 나가서 드러눕겠다. 나를 밟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 뒤에는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또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당신을 보낸 통치권자에게 보고하라’고 했다. 추기경이 원래 그렇게 세게 말씀을 하지 않는데 그날은 강하게 말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 훌륭하셨는데, 이번에 낸 책을 보면 김수환 추기경의 다른 모습도 적지 않게 있더라.

“신앙인으로서 저는 한 인물을 평가할 때 신화적 해석보다는 객관적 해석을 하려고 했다. 전체적으로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분 삶의 그늘도 남기고 싶었다. 그분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가장 아팠던 것은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 때였다. 우리가 지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농성하고 있는 중에 여름휴가를 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 친구가 감옥에 있는데 어떻게 휴가를 가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 창립 10주년(1984년) 행사를 못하게 했다. 로마 바티칸과 우리 정부한테 압력을 받았다고 하지만,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되더라. 또 1988년 오랫동안 갈등하던 서울교구 총대리(김옥균)에 대한 개인적 고민을 20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해서 드렸는데, 그것을 당사자에게 줬더라. 일종의 고백인데, 사제가 당사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말년에는 <조선일보> 등 보수신문만 보면서 그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그분이 왜 그렇게 변했나?

“그분의 한계가 분명히 있지만, 제 불찰도 있다. 서면 문제로 실망한 뒤에 발길을 끊었었는데 그래선 안 됐다. 후배로서 교구 사제로서 건강한 정보를 자주 들려드렸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 않는 바람에 그분이 듣는 정보가 편향되고 말았다. 그 점을 요즘 반성하고 있다.”

‘천사’처럼 살고자 했던 신학생

함세웅은 1942년 서울 원효로에서 목재상을 하는 집에서 3남 중 막내(형 2명은 6·25 때 사망)로 태어났다. 유교 집안이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을 따라 집 근처의 교회와 성당에 가서 놀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에서 복사(미사 때 사제를 시중드는 사람)를 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1957년 혜화동에 있는 신학교(성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1960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하느님 아들이 되고픈 그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다투거나 욕하고, 담배 피우는 신학교 친구들을 보면서 ‘왜 저러는 걸까, 천사처럼 살아야지’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학업 도중에 군에 갔다온 그는 1965년 교회에서 보내주는 로마 유학생 5명에 선발돼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가 유학을 간 때는 2천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가톨릭 교회가 가장 큰 변혁을 마무리할 즈음이었다. 요한 23세 교황이 1962년에 시작해 1965년 12월에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만이 유일한 교회’라던 기존의 주장을 접고, ‘타종교인, 심지어 무신론자일지라도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다’는 개방적인 구원론을 선언했다. 또,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할 것도 촉구했다. 이로써 그동안 성당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던 교회는 사회정의와 평화, 자유 등을 위해 나서는 적극적인 주체로 등장했다. 함세웅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뜨거운 숨결을 현장에서 직접 느꼈다.

┕1974년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된 것은 되돌아보면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계기가 뭐였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도 현장, 역사, 민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신학적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고난받는 청년 학생과 장준하, 백기완 등 민주화운동 선구자들을 보면서 교회도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때도 가슴은 아픈데 막상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는 못했다. 문화적 이질감도 있는 데다가 우리에게는 큰 모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 두번째 옥고를 치르고 서울 서대문구치소를 나오고 있는 함세웅 신부. 함세웅 신부 제공
1986년 명동성당 앞에서 시위 중인 민가협 어머니들 앞에 문익환 목사(왼쪽)와 함께 서 있다. 함세웅 신부 제공
그러던 중에 1974년 7월초에 원주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배후 혐의로 김포공항에서 납치돼 연행됐다. 우리의 스승이자 동료 사제, 교구장, 주교인 분이 불법으로 당하는 것을 보고는 여기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면 안 되지 않느냐는 생각들이 팽배했다. 원주교구 신부님들이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를 외면하는 것은 신앙적 양심에도 맞지 않았다. 7월9일 주일 저녁에 수도권의 신부 30명 가량이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 방에 찾아갔다. 대화 중 추기경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젊은 사제들이 찾아오니 한가닥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그 때부터 순조로웠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 다음날 지 주교 석방을 위한 첫번째 미사를 주교들이 중심이 돼서 명동성당에서 열었다. 그날 저녁 김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에 갔다. 미사가 끝나고 철야기도에 들어갔는데 지 주교가 9시반쯤 석방됐다. 그러면서 맥이 빠지고 사람들도 많이 귀가했다. 그러나,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지학순 주교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아직도 수백명이 감옥에 있으니 계속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밤새 대화와 토론을 했는데 ‘교회가 변해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냐, 이런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냐’는 반성이 쏟아져 나오더라. 다들 놀라면서 ‘이게 시대의 명령이구나’ 깨달았다. 그 때부터 매주 월요일에 각 지역을 다니면서 자발적인 미사를 올리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이것을 체계화시키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참석하지 못한 모임에서 사제모임 대표는 박상래 신부, 총무는 나한테 맡겼더라. 박 신부님과 제가 로마에 유학갔다 왔다고 그런 것 같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그해 9월26일 명동성당에서 저녁 미사를 올린 뒤 공식 발족했다. 사흘 전 원주에서 예행연습 격으로 첫 가두시위를 하긴 했지만, 사제들은 이날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속자 석방하라’ 등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명동성당 밖으로 처음으로 행진했다. 사제들이 시위할 줄을 예상하지 못한 경찰들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저녁 8시쯤 십자가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는데 겁이 나서 막 떨렸다. 그런데 우리가 유신헌법 철폐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자 주변의 시민들이 박수를 쳤다. 그 때 전율을 느꼈다. 아, 이게 불의와 싸워가는 신앙인의 자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세웅이 처음으로 세상 속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한인섭 교수와 대화하면서 ‘74년은 은총의 해’라고 했던데.

“제가 그해 3월에 한 잡지에 성서를 단지 과거 얘기가 아니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시대의 명령으로 읽어야 한다고 썼다. 지 주교의 구속으로 그런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며, 그런 의미에서 지 주교의 구속은 하느님의 묘한 섭리였던 것 같다. 지 주교가 구속이 안 됐으면 정의구현사제단이 안 생겼을 것이다.”

김인국 신부(앞줄 왼쪽) 등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2007년 10월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그룹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있따. 함세웅 신부(뒷줄 오른쪽 둘째)도 참석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가톨릭이 마르크스를 껴안았더라면”

함세웅은 사제단 활동을 하면서 1976년 3·1절 기념 명동성당 미사 때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국성명(3·1민주구국선언문)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2년형 선고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등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때를 비롯해 중앙정보부에도 여러차례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민주화 등 우리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약자보다는 강자, 소외받고 못 가진 사람보다는 많이 가진 기득권층의 편에 훨씬 가까이 가 있다.

“그게 우리 시대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1994년 사제단 창립 20주년 때 마크 엘리스라는 미국의 신학자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이른바 인권과 민주화, 민생을 위해 투신해 일했는데 정말 당신들이 뛰어서 교회가 변했느냐고 묻더라. 2000년 전에 예수님은 당시 정통 종교인 유대교에 맞서 싸우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데, 여러분이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사제라면 문제 많은 이 가톨릭 교회를 떠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당신들이 없으면 미성숙한 교회는 빨리 망할텐데 당신들이 자꾸 수혈해주니까 안 망한다고 질타했다. 또, 예수님은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그동안 생겨난 것은 온통 브로커뿐이라고 하더라. 그의 말을 들으면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런 신학적 발상을 저를 포함해 각 종교인들이 깊이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큰 도전 앞에 우리가 서 있다.”

┕어떤 도전인가.

“우리 시대 교회는 자본주의와 손잡고 있지 않나. 조금 과한 표현으로 하자면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나 노예가 됐다. 교회가 자본주의를 정화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로 먹고 살고 있다.”

┕교회의 상업화를 뜻하나.

“그렇다. 예를 들면 지금 한국 가톨릭이 김수환 추기경을 높이 받드는데, 그러면 그분 삶과 가르침을 재현해야 한다. 어려운 시절에 그분이 어떻게 살고 대처했나를 배우면서 그분처럼 살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온통 그분을 상품화시키는데만 열심이다.”

보충 인터뷰와 사진촬영을 위해 지난 13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서 다시 만났을 때 함세웅은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릭의 연대를 말했다.

“가톨릭이 19세기 말의 사상가였던 카를 마르크스와 껴안았더라면 아름다워졌을텐데 안타깝다. 가톨릭이 마르크스를 배척했던 이유로 내세웠던 것은 그가 무신론자라는 거였는데 명분만 그랬고 실제로는 공유사상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의 공유사상을 가톨릭이 껴안았더라면 세상은 많이 바뀌었을 거다. 이것은 여러 신학자들이 한 얘기이기도 하고, 나도 그런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정의구현사제단도 지금은 교회 안에서 소수 아닌가.

“예전에는 아무도 얘기 못할 때여서 사제단이 빛났지만, 지금은 다양한 시대여서 사제단도 여러 목소리 중 하나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회가 진전됐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름답게 살아온 사제들의 삶을 교회가 수용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본의 논리, 맘몬(부유와 탐욕의 상징)의 논리로 가는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늘 살아남은 소수가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긍지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적 소명이다. 게다가 지금은 교황이 새로 오셔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교회가 물신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요즘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소수자나 이슬람, 여성 등 약자를 구박하고 혐오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나 불교 등 종교의 신앙 수준이 아직도 좀 미숙한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모두 약자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인데 오늘의 종교 책임자들은 그 핵심을 놓치고 있다. 대신 종교 자체를 기업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교회세습까지 하고 있다. 공동체 원리를 망각하고, 상업적 논리를 따라간다. 돌아가신 안병무 교수는 문제 정치인을 ‘정상배’라고 부르는 것을 따라 개신교의 분파를 ‘종상배’라고 했다. 우리가 종상배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나. 언론인들의 책임도 큰 것 같다. 종교의 불의와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해야 하는데 종교 담당 기자들이 무슨 까닭인지 그런 보도를 잘 안하더라. 각성해야 한다.”

함세웅은 새로운 신학적 사조를 수용하는데도 늘 열려 있다. 1970년대 남미에서 탄생한 민중 중심의 해방신학에 관한 서적을 두 차례 감옥에 갔을 때 접하고는 바로 수용했다. 여성신학은 1991년 미국의 메리놀신학교에 공부하러 갔다가 접했다.

“처음에는 ‘여성신학은 또 뭐야’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고 나서는 여성의 시각에서 성경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가부장적 신관이 아니라 모성적 신관이었다면 아마 사랑과 평화가 훨씬 많이 깃들었을 것이라는 내용에 공감이 갔다.”

그 후 그는 가톨릭이 아직 수용하지 않는 여성 사제를 허용할 것을 촉구해 왔으며, 하느님에 대한 호칭도 ‘아버지 하느님’ 대신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며 어머니이신 하느님’으로 바꿔부를 것을 제안했다. 실제로 그는 미사 때 그런 호칭을 자주 사용하기도 했다.

“신부님, 축성을 부탁드립니다.” 한 가톨릭 신도가 지난 13일 오후 명동성당 앞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던 함세웅 신부를 알아보고 다가와 축성을 부탁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자본주의 때 묻은 명동성당 보면 화나”

은퇴한 뒤에는 길거리 미사도 자주 집전하고 참석했다. “3, 4년 전 성탄 때 쌍용차 해고 노동자 가족을 위해 성탄절에 대한문 앞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했는데 추위 속에 떨면서 깨달았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사형장이야말로 바로 교회의 원자리이며, 기도의 원형, 첫번째 미사라는 뜻이 다가왔다. 빼앗긴 분들과 함께 하는 길거리 미사야말로 다 빼앗기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아름다운 현장이 아닐까 싶다.”

┕고위 사제가 되는 등 다른 길로도 갈 수 있었지 않았나.

“그런 가능성은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관료체제에 찌들고 어용화된, 지금의 저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저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해서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동료들과 뜻깊게 보낸 것이 기쁘다.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자는 신학교 때의 초심을 늘 간직하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지킨 것 같아서 감사하다.”

┕후회되거나 아쉬운 것은 없나?

“제 강점이 빨리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어서 후회되는 것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부끄럽고 아픈 일은 있다. 1988~89년에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을 만들 때 노조와 부딪친 일이다. 당시 그런 경륜이 적은 데다가 이론적으로만 접근해서 그랬는데 지금 같으면 다르게 다가갔을 것 같다. 그때 고민하다가 대표직에서 물러났는데 그건 잘 한 것 같다. 그대로 책임자로 버텼더라면 아마 체제 내부의 한 사람으로 굳어져서 다른 영역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이 세상을 바꾸려던 원래의 설립정신을 잊어버린 채 교구의 관영매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점은 가슴 아프다.”

1988년 5월에 출범한 <평화신문>(당시 초대 이사장 김수환, 사장 함세웅, 편집국장 김정남)은 초기에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편지를 연재하는 등 참신한 기획과 진보적 기사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거부감을 보인 사쪽이 노조 간부 4명을 해고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함세웅은 89년 후반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은 이후 보수적 성향의 종교매체로 바뀌었다.

함세웅의 가장 빛나던 시절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 13일 보충 인터뷰 때 장소를 명동성당으로 정했다. 옛사랑을 만난 표정을 기대했지만, 정반대였다.

“여기 오면 솔직히 화가 난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 성지가 더 이상 아니다. 원형을 지키기는커녕 시위를 막으려고 넓은 길을 좁혀서 꾸불꾸불하게 만들고, 화단을 조성한 게 보기 싫다. 게다가 성당을 둘러보면 자본주의의 때가 너무 많이 끼었다.”

그는 성당 들머리에서 서둘러 인터뷰를 끝낸 뒤 성당 구내는 들어가지도 않고 명동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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