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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27 10:33 수정 : 2018.06.27 10:33

‘임수경씨 방북’ 전대협 의장단 일원
징역 산 뒤 졸업하고 ‘머나먼 방랑길’

중국 거쳐 파키스탄 지나 인도로
일본인 만나 결혼 뒤 잠시 귀국
다시 인도로 가 박사학위 받고 교수

5년 전 역경 위해 귀국해 함양 산골로
컨테이너에서 먹고 자고 농사일도

“공과 연기가 같은 것인데 오해 낳아
깨달음과 자비 실천이 다름이 아니고
너와 나가 함께 이로운 대승으로”

이름 뿐인 대승불교를 되살리고
서양철학 관점서 풀어낸 책 계획도

‘제2의 붓다’ 용수 번역한 신상환 박사

경남 함양 안의면 고반재 옆 콘테이너 안 중관학당에서 신상환 박사가 용수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옆에 멋들어지게 지은 고반재를 두고, ’컨테이너 중관학당’에 거처하며 역경작업을 하는 신상환 박사

삶은 뜻하지않게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신상환(50) 박사의 삶이 그렇다.

신 박사는 1980~90년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진 투쟁가였다. 독재의 심장을 향해 화엄병을 던지던 시위대의 주역이던 그가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불경을 번역하는 너무도 소박한 삶을 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신 박사가 ‘용수’(150?~250?)의 6대 대표작을 티베트어에서 한역으로 번역한 <중관이취육론>(도서출판b) 3권을 펴냈다. 용수의 한문본이 아닌 티베트어 저작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이번에 최초다. 용수는 ‘제2의 붓다’ 또는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남인도 출신인 용수는 젊은시절 희대의 난봉꾼이었으나 ‘공(空)사상’을 통해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불교계의 북두성이 되었다. 2천년을 뛰어넘어 용수의 대변인이 되어 나타난 신 박사를 찾아 경남 함양군 안의면 장자골 고반재를 찾았다. 고반재는 고려대장경연구소장 종림 스님이 고향마을에 지은 책박물관이다. 고려대장경을 디지탈화한 종림스님과 티베트어를 전공한 신박사가 고반재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고려대장경과 티베트대장경의 해후가 아닐 수 없다.

오전-오후-밤 세 얼굴의 생활

붓다와 보살들은 인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신 박사도 여러 모습을 하고 있다. 새벽 3시반부터 오전까지는 번역가로서 용수의 저작들을 투관하고, 오후엔 5백평의 밭작물을 가꾸는 농부로서 비지땀을 흘린다. 밤엔 고반재를 찾는 식객들과 통음을 마다하지않았다. 오전 오후 밤의 생활이 달랐던 그가 전에 없이 해사한 얼굴로 맞는다. 100일 넘게 금주 중이란다. 무려 10년 동안 공을 들린 이번 역경(譯經)을 세상에 내놓는 마음가짐이 남달랐다는 의미다.

신 박사는 1989년 임수경씨를 방북시켜 평양축전에 참석케 한 전대협3기 의장단의 일원이었다. 한양대 총학생회장이던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대협 의장이었고, 아주대 총학생회장이던 신 박사는 수원지역대학생협의회 평양축전 의장이었다. 그는 국가보안법과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등으로 수배 중 학내시위에 참여했다가 검거를 피해 학생회관 2층에 뛰어내리다 허리를 다쳐 붙들려갔다. 평양축전협의회 의장단 일원으로 그에게 ‘잡히면 옥바라지 해줄 사람이나 있느냐’면서 형처럼 걱정해주고 챙겨주던 중앙대총학생회장 이내창씨가 거문도 앞바다에 주검으로 떠오른 날이었다. 감옥에 들어간 뒤 눈을 감고 있어도 ‘내창이 형’의 환영이 보였다는 그는 분노와 저항으로 수갑이 채워진채 징벌방에 갇히는 고난을 반복했다. 그렇게 2년의 징역을 살고, 복학해 졸업을 하자마자 1994년 중국으로 떠났다. 머나먼 방랑의 시작이었다.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온 아노미와 함께 어린시절부터 배태된 한을 국내에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그 때만 해도 흔치않던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형은 자살을 감행하다 결국 출가했고, 그도 적지않게 방황했다. 아버지는 조합장을 하고 4만평의 땅을 경작하고 있었지만, 그는 부친의 신세를 지고 싶지않았다. 당시 호남 최고의 명문고였던 순천고를 졸업한 그가 아주대 환경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4년간 장학금을 보장받는, 고학의 길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파키스탄을 지나 인도로 들어갔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총격전 현장까지 통과하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는 눈사태를 만나 영원히 묻힐뻔 했다. 그런데도 그 위험들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내면의 내전을 치러온 그에겐 그다지 생소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한 서양인엑 100달러를 주고 산 자전거를 타고 인도 전역을 비박하며 하루에 3달러로 돌아다녔다. 고비사막에서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인디언처럼 홀로 춤을 추면서 ‘지금 이대로 죽어도 상관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97년 다르질링에서 일본인 여행객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후 귀국했다가 1999년 다시 인도로 가 타고르가 산티니케탄에 설립한 비스바 바라티 대학에서 아내는 미술을, 그는 티베트어를 공부했다. 애초엔 불경을 티베트어 원전으로 읽고싶어 1년만 공부할 셈이었는데, 티베트어 어원을 알기 위해 산스크리트어까지 배우다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렸다고 한다. 그 사이 티베트학어 산스크리트어 석사에 이어 캘커타대 파알리어과 철학박사까지 따고 비스바 바라티대 인도·티베트어과 조교수로 일했다. 그가 이번 번역에서 번역문 이상의 분량의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용수 사상의 본고장에서 공부하고 교수까지 했던 때문이다.

종림 스님 “종이 쪼가리 하나에 속냐”

그는 한국을 떠난지 20년이 된 2013년 귀국했다. 전임교수조차 매년 갱신하지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는 비자 받기에 지친데다가, 그 때쯤 돌아가지않으면 인도에 뼈를 묻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세미나 참석차 귀국했다가 종림스님이 보여주는 고반재 설계 팸플릿을 보고, 그곳에서 종림 스님의 밥이나 해주며 번역을 할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함양에 가보니, 그곳엔 고반재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가져다놓은 컨테이너 뿐이었다. 그는 그 컨테이너에 중관학당이라 이름 짓고, 고반재 건축을 돕는 감독관으로, 밥해주는 공양주로, 틈틈이 농사를 짓는 농부로 살면서 틈틈이 역경을 했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종림 스님으로부터 “일체가 공하다는 중관을 전공한 놈이 ‘종이 쪼가리’(팸플릿) 하나에 속냐”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고반재는 2년 전 다 지어졌다. 콘테이너상자에 비하면 아방궁이다. 그런데도 그는 고반재에 들어오지않고, 그 옆 ’콘테이너 중관학당’살이를 고집한다. 밥은 같이 먹는 식구지만, 고반재는 고반재고, 중관학당은 중관학당이라는 칼같은 성깔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 사는 아내와 고1 아들과 1년에 견우직녀처럼 고작 한두번만 보고, 그는 이 콘테이너에서 살며 농사를 짓고 역경을 하는 고행을 자처하며 자신을 채근해온 것이다.

그가 용수에 미친 것은 모든 이론과 고정관념까지 논리로서 샅샅이 부숴버리는 용수의 ‘중관(中觀)과 공성(空性)’에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이번에 번역한 책 가운데서 대표적인 <중론>(中論)에서 용수는 ‘사성제도 없고, 열반도 없고, 오온도 없고, 삼독도 없고. 여래도 없고, 업도 없고, 과보다 없다’고 한다. 석가가 말한 대표적인 깨달음의 진리조차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 조차 관념이고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제가 다 공한데 깨달음은 왜 필요하며, 공덕은 쌓아서 무엇하느냐’는 허무주의와 단견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한다.

신박사는 “용수의 원음이 제대로 전달되어야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 불자들이 예불 때마다 독경하는 <반야심경>이 ‘공사상’을 전하고 있음에도 핵심을 놓치고 있어서 오해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30일부터 전국 순회 북콘서트

불교의 핵심은 공과 연기(緣起)다. 연기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혹은 ‘내가 있으므로 너가 있고, 너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며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서로에 의지해 있다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그런데 ‘공과 연기가 실은 같은 것인데, <반야심경>에서 이를 말해주지않아서 오해를 낳고 있다’는 게 신 박사의 설명이다.

“ 공을 연기로 봐야 나와 너가 다름 없게 됩니다. 즉 자기한테만 좋은 게 아니라 남한테도 좋은 게 공덕이고, 이를 명확히 아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죽기 싫으니 다른 생명도 죽이지 마라’는 불상생 계율과 같은 불교의 대원칙이 이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과 자비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혹은 왜 수행을 해도 자비와 실천이 없느냐는 질문에 봉착한다. 신 박사는 “공이 연기라는 것을 모르고, 단견적으로 보기에 너와 나를 함께 이롭게 해야한다는 ‘대승’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용수 저작에 생을 바치기로 한 것은 이름 뿐인 대승불교를 진짜 대승불교로 만들기 위한 뿌리가 용수의 사상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는 중론의 3대 주석서를 비교하고 자신의 주석을 곁들인 책과 함께, 용수의 사유를 현대 서양철학 관점에서 해석하는 책을 펴낼 계획을 하고 있다.

북콘서트는 30일 오후2시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7월3일 오후7시 대구 자비선원, 4일 오후7시 부산 부산일보사 소강당, 5일 오후7시 대전 계룡문고, 11일 오후7시 광주 자비신행회에서 열린다.

함양/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신 박사가 티베트어 용수의 6대 대표 저작을 번역해 출간한 중관이취육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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