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03 18:35
수정 : 2018.06.06 19:30
[짬] ‘
1세대 민중신학자’ 서광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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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두 정상 모두 전후 세대입니다. 전쟁의 고통을 직접 겪지 않았던 두 사람이 한반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회담에 나선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전쟁은 너무 힘들어요.” 사진 강성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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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이자 목사인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책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한울 아카데미)는 ‘서광선의 정치신학 여정’이란 부제가 있다. 서 교수는 올해 한국 나이로 88살, 미수를 맞았다. 일본 강점기부터 평창올림픽 직전까지 저자가 펼쳐놓은 개인사는 바로 한국과 한국 교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서 교수를 지난달 28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부근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는 고 안병무 서남동 교수 등과 함께 1세대 민중신학자로 불린다. 12년 동안의 미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69년 귀국해 반유신 민주화·인권 투쟁에 힘을 보탰다. 1980년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이화여대 교단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광주항쟁 이후엔 기독교계의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88년 기독교계의 통일정책을 천명하는 백서(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 선언) 작성을 이끈 이도 그였다.
저자의 부친은 고 서용문 목사다. 서 목사가 한국전쟁 발발 뒤 평양에서 인민군한테 학살당한 사실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진보 자유주의 신앙관을 지닌 아들과 달리 부친은 보수 근본주의 목회자였다. 서 교수의 저술이 한국교회를 조금더 객관적이면서 균형 있게 바라봤다면 저자의 이런 특별한 신앙궤적 덕일 것이다. 부제의 정치신학이 말하듯 책은 한국교회와 정치의 관계 맺음도 꼼꼼히 살핀다. 이승만 정권이 기독교계에 당근책으로 제시한 군목제도나 박정희 정권 때 기독교계를 정권비판세력으로 자리잡게 한 한일협정비준 반대 운동 그리고 교계를 친미보수와 반미보수로 가른 분수령으로 평가한 19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에 대한 서술이 그런 예이다.
왜 정치신학인가? “정치신학은 위르겐 몰트만(1926~)이란 신학자가 내놓고 쓴 말이죠. 기독교의 신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정치를 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기독교인의 책임은 바로 하나님 정치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참여해야 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선교이죠.”
미수 맞은 ‘정치신학자’ 회고록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펴내
민주화·통일운동으로 해직 수난도
“80년대 이후 민중 그대로인데
기독신학계 대응과 분석은 부족
‘열강 각축 100년간 당할만큼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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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선 교수가 최근 출간한 회고록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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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해군 명예제대 뒤 유학을 떠났을 때 전공은 철학이었다. 미국에서 철학 석사까지 받은 뒤 뒤늦게 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군에 있을 때만 해도 기독교에 비판적이었죠. 왜 하나님이 한국 역사 속에 전쟁을 일으켰는지 늘 의문이었어요. 당시 남한의 근본주의 목사들은 한국 민족의 죄를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한국) 전쟁을 일으켰다고 했죠. 수긍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죠. 그런 설교를 들으면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 커졌죠.”
한때 매료당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놓고 대신 신학에 도전하기로 했을 때 이렇게 각오를 다졌단다. ‘목사 아버지의 근본주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회의를 풀고 도전하기 위해 신학을 학문적으로 탐구해보자.’ 신학 석사를 한 유니언신학대는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이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인종차별 철폐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등의 영향으로 사회 개혁적 목소리가 들끓던 시기였다. “유니언신학대에선 성경을 두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쓴 책이라고 가르쳤어요. 그때 천당 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는 유아적 기복 신앙에서 해방되었죠.”
박사를 따고 한국에 돌아온 1969년 독재자 박정희는 3선 개헌을 꾀하고 있었다. 그는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김재준 박형규 목사 등과 의기투합했다. “몰트만은 그나마 민주주의가 하나님의 정치에 가장 가깝다고 했죠.”
그는 한국 민중신학은 고 안병무 교수가 1975년 3·1절 예배 때 ‘민족·민중·교회’란 이름의 강연을 하면서 태동했다고 썼다. “1세대 민중신학은 60~70년대 압축 경제성장과 군사독재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지성인 편에서 성경을 해석하며 나왔어요. 인권 운동인 동시에 민주화 운동이었죠.”
지금의 민중신학은? “5·18이 민중운동이었다는 것을 밝힌 신학 논문 한 편이 없어요. 안타까워요. 5·18에 참여한 민중은 당시의 민중이었어요.” 그는 민중신학계의 이런 퇴조는 “87년 이후 우리 사회가 민주화됐다는 환상에 빠진”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민중은 그대로 있는데 신학계는 손을 놓고 있었다는 얘기다. “신자유주의로 빈부격차가 커졌잖아요. 헬조선을 외치는 청년 민중의 현실도 분석하고 대응해야 했는데 부족했어요. 이석기(통합진보당 소속 전 국회의원)같은 사람이 여전히 감옥에 있는 현실을 보고 아직도 민중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통일운동이었을까? “기독교계가 통일운동에 나선 전환점이 5·18이었어요. 5·18 이전 기독교계는 선민주 후통일을 말했죠. 하지만 신군부가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안보논리로 광주를 탄압하는 걸 보면서 분단 극복 없이는 민주화도 없다는 생각을 굳혔죠.”
그는 공산 체제로부터 박해를 받은 아버지 원수를 진짜 갚는 길은 “민족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 불안, 공포, 분노를 해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런 바람처럼 한반도는 곧 평화를 맞을 수 있을까? 그는 “낙관한다”고 했다. 이유는 “남과 북의 민초들이 정말 평화를 원하고 있어서”란다. “2차 대전 뒤 분단 국가인 독일과 베트남이 다 통일되었죠. 열강의 대결과 그로 인한 분단으로 한국 민중들은 100년 이상 고통을 받았어요. 당할 만큼 당했죠.”
고향은 평북 강계이다. 2005년 평양은 갔지만 1950년 월남 뒤 고향을 간 적은 없다. “(강계는) 강산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철도도 있어요. 내가 남한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까지 갈 수 있다면 분단문제는 이미 해결됐다고 할 수 있겠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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