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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10 10:51 수정 : 2018.01.10 11:05

조정래 작가 북인도 3200㎞ 순례

싯다르타가 6년간 고행한 동굴 안의 고행상 옆에 선 조정래 작가.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조정래(75) 작가가 지난달 21~31일 북인도 3200킬로미터를 달렸다. 8년 후 인생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 중인 ‘영혼과 내세’에 대한 소설 취재를 겸한 순례였다. 그는 “더 나이가 들면 장거리 여행이 어려워질 수 있어 미리 왔다”고 했다. <한겨레> ‘휴심여행’에 참여한 40여명과 함께였다. 여행다운 여행의 마침표가 될지도 모를 여정엔 골수 팬들이 빠지지 않았다. 한 40대 여성은 해외여행을 거의 해본 적이 없지만, 조 작가와 여행할 수 있는 기회여서 무조건 왔다고 했다. 가보로 남길 만한 글귀를 받고 싶어서 신청 마감을 넘겨 사정사정해 온 참가자도 있었다. 조 작가의 부인 김초혜 시인과 손자의 편지글인 최근작 <행복편지>를 들고 와 사인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첫 방문지는 가장 인도다운 고도 바라나시였다. 빼빼 마른 인력거꾼이 페달을 밟아 인파와 소와 개들의 난장판을 미꾸라지처럼 빠져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나룻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자 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대여섯 곳의 화장터 가운데 주검을 태울 장작 살 돈마저 부족한 빈자와 장작값 정도는 개의치 않는 부자의 마지막 불길은 카스트계급보다 확연했다. 그 건너편으로 영혼을 정화한다는 힌두교 의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가촉천민’(접촉해서도 안 된다는 최하위 계층)일 듯한 빈자들마저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사제의 근엄한 몸짓에 눈을 고정한 채 구원을 갈구했다. 갠지스강은 온갖 혼돈을 삼키며 유유히 흘렀다.

그의 아버지 ‘승려 조종현’도 아른아른

고타마 싯다르타는 영롱한 설산 옆 고향을 떠나 왜 이 아수라장으로 나왔을까. 물안개 속엔 조 작가가 토해낸 현대사의 피울음이 아스라하게 피어올랐다. 만해 한용운이 만든 항일독립운동 지원단체 만당의 자금책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서북청년단에게 맞아 엉덩이에서 구더기가 슬던 그의 아버지 ‘승려 조종현’을 그린 <태백산맥>의 ‘범일’이 거기 있었다. 분단된 땅에서 불가촉천민이나 개돼지처럼 취급됐던 빨치산과 좌익들의 눈물도 서리처럼 어려 있었다.

중생의 병은 무지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심에서 온다고 했던가. 중생이 아프니 그도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조 작가는 1983년 인도 초행길에 문학인들과 갠지스강에 왔을 때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문학인들이 ‘저게 사는 건가’라며 인도인들을 짐승처럼 경멸하자 그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아픔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라고 했다.

다음날 일행은 애초 예정에도 없던 둥게스와리행을 감행했다. 둥게스와리는 ‘버려진 땅’이란 의미다. 싯다르타는 ‘주검을 버리던 땅’으로 찾아들어 6년간 고행했다. 조 작가는 무리한 일정으로 초반에 감기에 걸렸음에도 흔쾌히 산 중턱에 올랐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신분을 버린 고행승이 주검을 싸맨 옷을 주워 맨몸을 가리고 오르던 그 길이었다. 산길엔 여전히 버려진 사람들이 구걸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낮은 출입구로 몸을 낮추어 들어서자 대여섯평쯤 되는 평평한 동굴, 정면에 고행상이 있었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싯다르타였다. 원불교 서울교구장과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원로인 이선종(74) 교무는 “사람들은 보통 깨달은 뒤 석가모니의 광명만을 기억하지만, 그 빛을 낳기 전 처절한 고행이 있었다”고 말했다.

‘버려진 땅’ 둥게스와리 동굴
2600년 거슬러 싯다르타 앞에 섰다

앙상한 고행상 오래도록 응시한 뒤
밖으로 나선 그의 얼굴이 빛났다

“동굴 속에서 느낀 영적 체험
소설 속에서 보게 될 것”

구원 품고 흐르는 갠지스강 물안개엔
그가 토해낸 현대사 피울음 아스라이

20여년 동안 꼬박 하루 16시간씩
스스로를 가둔 글 감옥

인간 존중 없는 문학은 문학 아니라며
중생이 아프니 그도 아팠다

‘혁명가 붓다’의 삶과 길 따라

싯다르타가 스스로를 가둔 동굴은 조 작가에겐 ‘굶는 과’로 불린 국문과를 택한 결단이었고, 20여년 동안 하루 16시간씩 자신을 가둔 글 감옥이었다. 또 빨치산들을 다룬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빨갱이 아니냐’며 11년간 조사를 받아야 했던 굴욕이었다.

그 어둠의 동굴에서 조 작가는 2600년의 시간을 넘어 고행승 싯다르타 앞에 섰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급 차별이 가장 심한 이곳에서 왜 당신은 ‘모든 사람이 다 부처’라고 했나요. 귀족이 노예쯤은 때려 죽여도 별 죄가 안 되는 그 시절에 왜 어떤 생명이든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나요. 왜 신으로 숭배받을 수 있었는데도 자신을 숭배하지 말고 진리를 깨달아 스스로 그 길을 가라고 했나요. 싯다르타를 오래도록 응시하고 동굴을 나선 그의 얼굴이 빛났다. 조 작가는 그 산을 내려와 “동굴 속에서 느낀 영적 체험을 소설 속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순례는 ‘사람이 곧 부처’라는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과 <금강경>을 설한 기원정사, 길에서 죽는 순간에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제하려 최선을 다했던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로 이어졌다. 그 모든 여정엔 버러지 취급을 받는 당신도 바로 부처라는 ‘혁명가 붓다’의 삶이 있었다.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한 사슴동산에서 명상 중인 휴심여행 참석자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아내는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

참가자들은 고단한 순례 중 ‘인간 조정래’에 대한 탐구도 놓치지 않았다. 단연 인기를 끈 화제는 부인과의 러브스토리였다. 대학 2학년 때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김초혜와 일등병으로 결혼을 감행한 조 작가는 신혼 초부터 자신이 연탄을 다 갈고 연탄재를 버리고, 김칫독을 묻고 설거지를 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도 부인에게 커피 타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김 시인이 섬섬옥수와 감수성을 유지하게 돕고 있다고 한다.

조 작가는 부인에 대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라며 닭살 돋는 자랑을 태연자약하게 했다. 여성 참가자들은 “붓다만 혁명가인 줄 알았는데, 벌써 50년 전부터 조 작가도 남성우월주의를 벗은 혁명가였다”고 호응했다. 특히 외아들에게 자기 욕심을 투사해 삶의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고, 그 아들 결혼식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고 양가에서 50명씩 딱 100명의 가족들만 불러 치른 철저함엔 ‘또 다른 수도승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노성자 교무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누구나 홀로 선 나무/ 서로 가지를 뻗어/ 어깨동무를 하여 숲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조 작가의 시를 읊조리며 삶을 평했다. 고행승 싯다르타가 45년간 길에서 고통 중생들과 고락을 함께했듯이, 조 작가가 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가족 및 현대사의 상흔을 지닌 이들과 어깨동무로 아픔을 나누며 숲을 이루어가도록 해왔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온 김옥자(66)씨는 “이번 순례는 한결같이 잔잔한 파동이 공진되어 피로감을 완전히 녹여버렸다”고 말했다.

인도/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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