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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27 01:40 수정 : 2017.12.29 15:34

【짬】 자살예방 사찰 묵언마을 지개야 스님

지난해 새로 둥지를 튼 전남 여수의 묵언마을에서 만난 지개야 스님.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없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다. 부처의 얼굴이 휑하다. 자비로운 눈빛의 눈도 없고, 풍요로움이 머문 반듯한 코도 없고, 깊은 미소를 품은 입도 없다. 오직 있는 것은 두 귀. 스님이 직접 만든 나무 불상이다. 고목나무 뿌리를 깎아 만들었다. 독특하다. 불상 뒤에 글이 있다. “중생아! 400년 수행에 눈도, 코도, 입도 다 필요 없더라. 부처님한테 네 소원 한가지만 빌어라. 두 귀로 듣고 꼭 해결해 주리라.”

스님은 죽으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살하려는 이들의 하소연을 들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무려 3천여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지루해하지 않고, 끈기있게 들었다. 이야기하다가 지치면, 자다가 일어나서 또 이야기를 했다. 같이 울고, 같이 울었다. 스님은 그들에게 묵을 곳과 먹을 것도 제공했다. 자신이 만든 불당의 부처처럼 스님은 듣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살’은 ‘살자’로 바뀌었다. 들어주는 이 없는 시대에 지개야 스님(사진)은 ‘들어주기 명인’이 됐다.

가난한 나무꾼 아들로 태어나 가출
온갖 험한일 하며 대학원까지 마쳐
소키워 자수성가한 뒤 정치인 입문
2004년 ‘단 한명이라도 구하자’ 출가

묵언마을 열어 ‘들어주는 곳’ 입소문
“말없이 스스로 들여다보면 답 찾죠”
상담사례 ‘죽음을 깨운 이야기들’ 펴내

지개야 스님이 고목나무 뿌리를 직접 가다듬어 만든 목불상. 눈코잎은 없고 오직 ‘들어주는’ 두 귀만 있다.
자살하려는 이들이 삶의 막판에 찾아가기로 유명한 지개야 스님의 상담 방법은 남다르다. 몇년 전 50대 중반의 한 여인이 찾아왔다. “스님, 무슨 전생에 지은 죄가 커서 이리 기구한 삶을 살아야 하나요?” 울면서 하소연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몇시간 계속됐다. 남편에게 여러 차례 배반당하고, 재산 문제로 자식들과도 관계가 틀어진 여인은 더 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했다. 길고 긴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지금부터 한달간 휴대폰을 끄고, 말도 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화가 치밀면 막춤을 추세요. 아무리 어려운 인생 굽이라도 한 시간만 웃으면서 막춤을 추면 해결됩니다. 인간의 뇌는 바보 같아서 가짜 웃음에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곤 스님이 먼저 막춤을 추었다. 주저주저하던 여인은 일어나서 막춤을 추었다. 스님은 이야기했다. “보살님이 제일 잘 추는 막춤은 보살님 막춤이고, 제일 어려운 막춤은 다른 사람 막춤 따라 추기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의 막춤처럼 인생이 따로 있습니다. 언제고 화가 나거든 보살님의 막춤을 추세요.” 여인은 지금도 가끔 스님에게 전화를 하며 안부를 전한다고 한다. “막춤을 추고 있어요. 행복해요.” 스님은 상담 관련 10여개의 자격증이 있다.

스님은 뒤늦게 출가했다. 지난 2004년, 50대 중반이었다. “우연히 뉴스를 들었어요. 한국에서 45분마다 한 사람씩 자살한다는 거였어요. 충격이 컸어요. 그때 경북도의원 임기를 마치고 국회의원 출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정치도 의미있지만 죽으려는 이 한 사람이라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그는 갑작스럽게 출가(태고종)했다. 속명 우재석을 버리고 법명 지개야(복을 구걸하는 거지야)를 받았다. 그러고는 사재를 털어 경기도 안성에 방 15개 있는 사찰을 지었다. 하지만 절 사(寺) 자가 없는 ‘묵언마을’로 이름지었다.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은 오라고 광고를 했다.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찾아왔다. 무료로 묵언마을에 머물며 묵언수행을 하게 했다.

지개야 스님

묵언수행을 마친 이들은 스님에게 응어리진 사연을 풀어놓았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들어만 줘도, 그들은 스스로 답을 찾았다. “묵언은 단순히 입을 닫는 게 아닙니다. 움직이는 마음을 따라가며 왜 마음이 그렇게 가는가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남과 시비하지 않고, 나와의 대화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답을 찾습니다.”

스님은 아주 힘든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경북 안동의 산동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가출해 도시로 나왔다. 거칠고 험하게 살았다. 중국집 음식 쓰레기를 뒤져 고기를 찾아 수돗물에 씻어 먹기도 했고, 구두닦이에, 볼펜 장사까지 온갖 일을 하며 안동농고를 졸업했다. 10년 만에 전문대에 입학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엔 동양대 행정학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안동대 동양철학과와 건국대 축산경영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20년간 축협 직원으로 근무했다. 1980년대 초 소값 폭락 파동이 일어났다. 농부들에게 곧 소값이 오르니 소를 팔지 말라고 했으나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는 농부들에게 돈 버는 방법을 알리기 위해 소를 100마리 사서 먹였다. 곧 소값은 올랐다. 번 돈으로 도시에 집을 샀다. 소값이 떨어지면 도시에 있는 집을 은행 담보로 빚을 내 다시 소를 사 돈을 모았다.

목불상

기름기가 많다는 이유로 외면하던 소 등심을, ‘꽃등심’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붙여 온 국민의 입맛을 바꾸었다. 역시 기름기가 많아 버리던 차돌박이도 국민 밥상에 올리는 마케팅도 했다. 스님은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줄 그 누군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누군가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줘야 합니다.”

올해 초 법당을 여수 바닷가로 옮긴 스님은 최근 자신과 상담한 절박한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준 사례를 모아 <죽음을 깨운 이야기들>(묵언마을)을 펴냈다.

여수/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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