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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20 18:50 수정 : 2017.12.20 22:31

[짬] 천도교 이정희 교령

이정희 천도교 교령.

서울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우이분소 앞에 봉황각이 있다. 천도교중앙총부 건물을 50년 전 옮겨온 벽돌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건물 뒤로 돌아가니 인수봉에서 날아온 듯한 모습의 봉황처럼 우아한 한옥 기와집이 나타난다. 천도교 3대 교조 의암 손병희(1861~1922)가 3·1운동 7년 전인 1912년부터 비폭력 평화 독립운동의 전사들을 양성한 곳이다. 의암이 수운 최제우-해월 최시형으로 내려오던 천도교의 도통을 이어받은 ‘인일(人日) 기념일’(24일)을 앞두고 천도교 이정희(72) 교령을 19일 봉황각에서 만났다.

“이곳은 의암성사께서 7차례에 걸쳐 모두 483명에게 이신환성(以身換性) 수련을 시켜 3·1운동을 준비한 곳이다.”

‘이신환성’이란 ‘육신의 안락을 위한 삶을 성령의 참된 삶으로 바꾸라’는 의암의 가르침이다. 이곳에서 49일씩 수련으로 체험한 성령으로 무장한 이들이 전국으로 내려가 시민운동을 전개하며 훗날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게 하는 데 막중한 구실을 했다고 한다. 두 달 뒤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 이곳에서 싹을 키운 것이다.

의암 손병희

“해방 직후 백범 김구 선생도 귀국하자마자 이곳을 찾아 의암 묘를 참배하면서 ‘3·1운동이 아니었으면 임시정부가 없었고, 의암이 없었으면 3·1운동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두번이나 참례했다.”

자유당 시절인 1959년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가 결성돼 이승만 대통령이 명예위원장을 맡고 조동식 동덕여대 총장이 위원장을 맡아 파고다공원에 동상을 세우고 전기를 쓰고 묘비를 제막했는데 미처 기념관은 짓지 못한 채로 1965년 사업회가 해체됐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중국의 국부인 쑨원(손문)이나 인도의 국부인 간디에 비견할 민족지도자인 의암의 뜻을 기리고 유물을 제대로 전시할 공간이 없다고 했다. 더구나 서울시 유형문화재 2호인 봉황각마저 지어진 지 100년이 넘어 틈이 벌어지고 조금씩 기울어져 보전관리가 어렵고, 3·1운동 전에 수련하던 소봉황각도 사라져 복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봉황각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고, 인근에 기념관을 지어 의암의 묘와 함께 성역화했으면 한다.”

의암이 천도교 도통 받은 24일
인일기념일 앞두고 인터뷰

의암은 혁명가이자 민족운동가
아직 유물 보관 기념관 없어
기념사업회 발족 준비중
지난달 인내천운동연합 출범

서울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 전경

그런데 3·1운동 100돌을 앞에 두고, 3·1운동을 잇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정확히 인식하는 문재인 정부의 출범을 의암기념관 건립의 청신호로 보고 있다. 특히 최근 초대 기념사업회 위원장이던 조동식 선생의 손자인 조원영 동덕여대 이사장이 의암기념사업회를 열성적으로 준비중이라고 한다. 이 교령은 기념관 건립에 천도교가 앞장서기보다는 조력 구실만 하고 싶어 한다. 의암은 천도교인들의 스승이기도 하지만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여러 종교와 화합해 비폭력평화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이자 동학 혁명가이자 시민운동, 여성운동, 어린이운동, 언론·출판·교육운동을 이끈 근세의 선구자이므로 교단 차원이 아니라 범국민적 차원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령은 동학혁명과 3·1운동에서 외세에 맞서 천도(동학)교인들이 불쏘시개가 되었듯 민족 통일을 위해서도 잘 쓰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북에서 노동당에 이어 제2 정당이 천도교청우당이다. 남북이산가족상봉단장으로도 온 류미영(지난해 별세)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이었다. 해방 때 북에만 천도교인이 200만명이었고, 여전히 북에서는 천도교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천도교를 통해 남북이 화해와 통일의 활로를 찾았으면 좋겠다.”

그는 “최근 종교지도자들의 청와대 오찬에서 대통령께도 이 점을 말씀드렸다. 최덕신·류미영 위원장 부부의 아들인 최인국씨가 이 정부 최초로 최근 방북 허가를 받아 북에 다녀온 게 교류의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1912년 첫번째 수련을 마친 뒤 제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의암 손병희(둘째줄 가운데)

봉황각은 이 교령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소다. 서울 홍릉의 카이스트 전신인 키스트(KIST)에 재직하던 33살 때 봉황각에 와 1주일간 시천주 주문 수련을 하면서 성령(한울님)을 체험한 것을 진짜 인생의 시작으로 본다. 독실한 천도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음을 깨달은’ 그때가 참천도교인으로서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한번도 ‘천도’를 의심하거나 좌고우면하지 않고 달려왔다고 한다. 1992년 카이스트가 대전으로 옮겨가 대전에 살며 계룡산에만 2천번을 올라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말이면 새벽에 손전등을 들고 올랐다. 그는 그런 일심의 집중력을 이제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인내천’(곧 한울님) 사상을 펼치는 데 모으고 있다. 지난달 24일 인내천운동연합을 출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공경하고 누구나 한울이니 차별 말고 대하라는 ‘인내천’보다 더한 인간존중과 평등이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이 ‘사인여천’(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이란 휘호를 자주 썼던 것도 그 때문이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사람 중심이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말이다.”

이 교령은 “나라엔 경제적 지엔피(GNP·국민총생산)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존엄하게 대하는지로 가늠되는 ‘정신적 지엔피’를 높여 진정으로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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