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12 18:51
수정 : 2017.12.12 20:38
<8> 충남 보령 시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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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 천북면의 문화르네상스를 연 시온교회 김영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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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시 천북면은 농지와 야산, 농가가 어우러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골이다. 이 ‘별 볼일 없는 곳’이 얼마 전부터 ‘별 볼일들’이 많아졌다. 폐교 위기에 처한 낙동초등학교 어린이 26명 전원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됐고, 어부들과 할머니들이 커피를 배워 바리스타가 되고, 아무런 상업적 판매 없이 먹거리를 퍼주는 축제가 열리며, 이 희한한 마을들을 돌아보려는 마을 여행객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시골에선 꿈꾸기 어려운 것들을 꿈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이가 천북면 신죽리 시온교회 김영진(57) 목사다. 장항선 광천읍에서 차로 10여분을 가니 시온교회다. 멋들어진 건물도 아니고, 십자가 첨탑이 높이 서 위용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1993년 김 목사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골 마을 40여명의 교우들이 무너지기 직전인 교회를 새로 폼나게 짓자고 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교회를 폼나게 짓는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니고, 모이는 우리가 교회처럼 사는 게 중요하다”며 인근 농가들과 별다르지 않은 소박한 교회를 지었다.
20년 마을 벗 자처하는 김영진 목사
평범한 시골 왁자지끌하게 바꿔
거금 들여 빔프로젝트 구입해
예배당극장 열어 영화 틀어주고
뒤이어 노래방 기계도 들여놔
먼저 마이크 잡고 한 곡조 뽑아
폐교 위기 초등교 오케스트라 만들고
할머니들 커피 가르쳐 바리스타로
소박한 꽃잔치로 시작한 축제
머드축제와 함께 보령의 ‘명물’
날마다 한 시간 이상 농사 공부해
쌀 서울 직판하고 배추절임 사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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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목사가 스쿨버스로 실어 나르는 낙동초등학교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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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치고 연극인이 꿈이던 청년
그런 그가 거금 550만원을 들여 가장 먼저 구입한 게 빔프로젝트였다. 그러고는 예배당 강단에 광목천으로 200인치 스크린을 설치해 따분한 노인들에게 재미있는 영화들을 보여줬다. 예배당 극장엔 교우들만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또 시골 사람들에게 기독교 영화를 보여주자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안 있어 노래방 기계도 구입했다. ‘예배당에서 이래도 되냐’는 이들 앞에서 김 목사가 먼저 노래를 한 곡조 뽑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자 앞다투어 마이크를 잡았다.
시골 마을의 문화 르네상스는 이렇게 출발했다. 축제도 마찬가지였다. 신죽리수목원에서 매년 11월이면 열려 머드축제와 함께 보령만의 축제로 떠오른 온새미로축제도 시온교회에서 소박한 꽃잔치로 시작됐다. 꽃을 보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니, 자기 집에서 키우는 화분들을 한데 모아놓고 구경해보자는 것이었다. ‘생김새 그래도’ 혹은 ‘언제나 변함없이’란 순우리말 ‘온새미로’처럼 김 목사는 20여년을 한결같이 주민들 곁을 지켰다. 그는 최근 ‘자랑스런 충남인’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그는 충남이 아니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는 농사의 농 자도 몰랐다. 대학 때까지 그룹사운드에서 기타를 치고 연극인이 되기를 꿈꾸던 그였다. 그래서 농촌엔 무지렁이였기에 ‘전혀 다른 농촌’을 꿈꿀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도 농촌에 ‘날탕’인 것은 아니다. 그는 농사일을 못했지만, 운전 실력으로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트럭으로 서울에 싣고 가 직판했다. 또 배추 산지인 이곳에서 배추절임 사업을 해보자고 설득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배추절임 판매처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 목사는 또 매주 ‘이주의 농사정보’를 교회 주보에 실었다. 1990년대 천리안과 하이텔의 농사동호회에 가입해 매일 한 시간씩 뒤져서 정리한 정보였다. 지금도 그는 매일 한 시간 이상 농사에 대해 공부하는 ‘농사 수도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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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목사가 스쿨버스로 실어 나르는 낙동초등학교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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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밖에선 예수의 예 자도 안 꺼내
그는 지금까지 교회 밖에 나가 교회와 예수에 대해 얘기해본 적이 없다. 돼지농가에 갈 때는 돼지에 대해 공부하고, 한우농가에 갈 때는 한우에 대해 공부하고 가 그들의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들려주려고 애썼다. 교회에서 꽃화분들을 가져다 놓고 온새미로축제를 열 때도 농부들이 좋아하는 막걸리와 안주가 빠지지 않도록 했다. 그는 목사라기보다는 마을 청년이고, 벗을 자처했다.
그래서 인근 낙동초등학교가 학생 수 부족으로 교육청이 폐교 대상 학교로 지정하자 학부모들이 가장 먼저 찾아온 이도 김 목사였다. 방과후학교 지원마저 끊겼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교회에서 운영하던 방과후 공부방을 그대로 낙동초교로 옮겼다.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는 교회에서 가르치던 피아노를 학교에서 가르쳤다. 입학생이 2명밖에 안 되자 김 목사는 바닷가 마을 학성리까지 찾아가 아이들을 유치하고는 등하교를 책임졌다. 김 목사는 하루에 무려 64킬로미터를 돌며 학생들을 데려오고 바래다주는 스쿨버스 기사를 11년째 하고 있다. 동문회에서도 모교가 폐교되지 않게 재학생 전원에게 바이올린을 사주며 도왔다. 이종철 동문회장은 ‘김 목사도 이렇게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스쿨버스 운전을 도왔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지역민들은 더욱 끈끈해졌다.
노인들도 덩달아 오케스트라
낙동초등학교는 한 방송사의 주선으로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이 두 달간 상주하며 아이들을 가르쳐 함께 연주하는 ‘천상의 수업’으로 큰 감동을 선물해 유명해지기도 했다. 지금도 낙동초등생 26명 전원은 합창단이면서 악기를 몇개씩 다루어 합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아이들은 천북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오케스트라단을 유지하고 있다. 시골 아이들의 악기 연주 바람은 어른들에게 이어져 노인들이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배워 오케스트라단을 만들어 이제 동요 정도는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홍성군 광천읍에 나가서 노인 15명 오케스트라단이 공연을 시도한다.
이곳에선 커피 바람도 불고 있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 주민들에게 사진과 ‘커피’를 가르쳤다. 이렇게 시작된 커피 바람은 보령의 자랑이 되고 있는 ‘말통커피’ 사업으로 이어졌다. ‘말이 통하게 한다’는 뜻의 ‘말통커피’는 경기도 파주에서부터 서해안을 따라 12개의 체인점을 갖추고, 로스팅과 기계수리, 배달까지 모두 ‘목사 티 안 내는 목사들’이 해내는 사회적 기업이다. 학성리 어부들이 커피를 배워 축제 때마다 자기들 돈으로 커피를 제공하는가 하면, 할머니 바리스타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김 목사는 요즘은 천북과 보령의 자랑인 커피와 바다, 공룡섬, 수목원 등을 묶어 힐링하는 ‘마을여행’을 서울의 지인들에게 소개하느라 신이 나 있다. 김 목사가 그렇게 신이 날 때마다 더욱 신이 나는 것은 지역민들이다. 시온교회 신자가 몇 명이냐는 물음에 김 목사가 3300명(천북면민 수)이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보령(충남)/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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