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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2 17:02 수정 : 2005.11.23 13:54

손병희가 현도 뒤에 지은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천도교중앙대교당. 서울지방 유형문화재 제36호다.

외세반대·혁신 사회운동체에서 근대적 종교로

천도교가 이 세상에 제 모습을 나타낸 지 100년이 됐다. 천도교는 1960년 수운 최제우의 도통으로 창도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서학(기독교)으로 오인 받아 박해를 받게 되자 서학과 구별 짓는 동학이란 이름을 썼지만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탄압을 피해 지하에 숨어 있는 46년을 천도교는 ‘은도(隱道) 시대’라고 부른다. 마침내 동학은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에 의해 1905년 12월1일 천도교란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도교는 그 이후를 ‘현도(顯道) 시대’라고 부른다.

◇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된 계기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동학은 초기부터 이단으로 박해를 받아 1세 교조 수운 최제우가 1864년 관에 잡혀 참수를 당한 데 이어 1898년 2세 교조 해월 최시형마저 처형을 당하자 법통을 이은 3세 교조 의암 손병희는 1902년 미국 망명을 모색하다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무렵 국내에선 서북지방으로 교세가 급신장했다. 그러자 손병희는 1904년 국내에 진보회를 조직해 이용구를 회장에 임명하고 대대적인 민회운동을 벌였다. 이것이 20만 교인들이 상투를 잘라버리고 단발하며 혁신을 부르짖은 갑진개혁운동이었다.

정부는 이들이 동학당임을 알고 탄압을 가중시키자 이용구는 이에 당황한 나머지 송병준의 회유에 넘어가 자의적으로 진보회를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합쳤다. 급기야 이용구는 ‘일본의 보호 아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유지하자’는 매국 선언을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이 선언 10일 뒤였다. 이에 따라 동학은 친일단체로 비난을 받게 됐다.

의암은 이에 대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해 세상에 선포했다. 천도교란 명칭은 애초 수운이 자신의 깨달음을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인즉 동학”이라고 한 동경대전 논학문의 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의암은 1904년 귀국해 송병준과 이용구 등 친일파 두목 62명을 출교시키고 중앙총부와 72개 대교구를 설치하는 등 교단조직을 정비했다.

◇ 현도가 준 의미= 천도교로 개칭(현도) 전 동학은 동학혁명이나 갑진혁신운동 등 일제를 비롯한 외세를 반대하고 내정을 혁신하려는 정치성 강한 사회운동체로 인식됐다. 따라서 일제시대 강제 해산될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이 때 천도교란 근대적 종교의 틀로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라 천도교는 1919년 손병희를 중심으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힘을 비축할 수 있게 됐다.

◇100돌 기념= 천도교는 현도 100돌 기념일인 12월1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경운동 중앙대교당에서 ‘현도 100주년 선언문’을 발표하고 강연회와 국악공연을 펼치는 등 기념식을 거행한다.

이에 앞서 26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서울 세종로 한국언론회관 20층 국제회의실에서 ‘한국 사회에서의 천도교 100년, 그 진단과 전망’을 주제로 기념학술발표회를 연다. (02)732-3956.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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