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을 폐쇄하고 선승들이 정진하는 경북 문경 희왕산 봉암사 경내로 한 선승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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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나라 산·절 떠돌며 눕지도 않고 매일밤 참선
“앉은채 떠날수 있나” 말에 그자리서 찻잔 든채 입적 원명은 혜수와 한겨울에 상원사에서 북대까지 오른 적이 있었다. 오대산은 눈이 많기로 유명하다. 원명은 발목까지 덮는 농구화를 신었다. 그러나 눈에 빠져 눈밭을 걸을 수 없는 털신을 신고 있던 혜수는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원명은 농구화를 신고도 발이 시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혜수는 맨발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곤 북대에 도착해선 얼음물에 발을 담가 얼음을 빼냈다. 원명은 “육체의 고통정도는 아예 초탈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초인적인 수행력의 결과였다. 혜수가 해인사 강원에 다닐 때였다. 동안거 중 음력 12월 8일 성도절(붓다가 깨달은 날)이 되면 대중들 가운데 희망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용맹정진(전혀 눕지 않는 좌선)을 했다. 선원에선 괴팍한 혜수의 참여를 거절했다. 그런데 용맹정진 시작 날부터 혜수는 절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일주일 뒤 용맹정진을 마친 스님들이 처소로 돌아와 보니 방안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스님들이 코를 틀어막고 탁자 밑을 보자 혜수가 그 밑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굳어진 채로 펴지지도 않아 병원에 가서야 펼 수 있었다. 일주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똥오줌도 그대로 누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육체를 조복 받았다. 혜수는 시력이 나빠 글씨를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역대 조사들이 안경 쓴 일이 없다”며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았다. 혜수는 대웅전에 있는 화엄 탱화 속 신중의 눈에 바늘을 꽂으며 “진정 이 신중에게 영험이 있다면 이렇게 해를 끼쳤으니 내 눈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영험을 실험했다고 한다. 두려움 많은 세인에겐 기도 안 찰 실험이다. 선승인 관도 스님은 “틀에 박힌 격식을 거부하고, 몽둥이로도 과감히 실험을 하는 그런 선승을 남의 눈치나 살피는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혜수는 80년대 초 선방 결제 뒤 남장사를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날 사자평을 넘으며 젊은 선승들에게 혜수는 “선사라면 선사답게 좌탈입망(앉은 채로 입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밀양 표충사에 도착해 객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한 선승이 “그럼 스님은 좌탈입망할 수 있습니까”하며 따지듯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혜수는 찻잔을 든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구름이 가듯, 옷을 벗듯 혜수는 그렇게 허물을 벗어버렸다. 사망을 확인하는 경찰도 ‘앉아 있는 주검’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간첩의 독침을 맞으면 즉사한다는 소문도 있는 때여서 병원으로 옮겨 해부까지 했으나 독침을 맞거나 독극물을 마신 흔적도 없었다. 그가 방장이나 조실이었다면 달마나 육조 같은 조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전해진 좌탈입망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세상이 요란할 일이었지만, 떠돌이의 법구는 조용히 불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탑도 세워주는 이 없었고, 상좌(제자) 하나 없으니 그를 기리는 제사도 없다. 희왕산의 나무가 소리 없이 물들고 있다. 옷을 벗으려나 보다. 혜수가 간 것도 가을이었다. 문경·상주/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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