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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뒤로 푸른 노송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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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무소유은자’ “스님, 출가자는 절대로 술 마시면 안 됩니까?” “…” “스님, 출가자는 절대 연애도 해서는 안 됩니까?” 18살에 출가한 효림 스님(실천불교승가회 의장)이 정영 선사(1925~95)에게 물었다. 이제 막 세상사에 눈을 떴지만, 자신의 몸엔 이미 승복이 걸쳐져 있었다. 마침내 가슴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을 은사나 다름 없는 사형(같은 은사에게 출가한 선배)에게 물은 것이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영이 말했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 세속 친구들처럼 술도 마시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던 효림이 그토록 원하는 답이었지만, 청정하기 그지 없이 살아온 사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깡패가 마시는 술이 있고, 학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선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중이 마시는 술이 있다. 중이 깡패처럼 술을 마셔서야 되겠느냐.” “어떻게 마시는 것이 중답게 마시는 것입니까?”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중이 술을 마시고, 중이 연애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칭찬 받을 행동만 해도 그것이 남을 의식해서 박수받기 위해 한 것이라면 수행에 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라도 수행을 돕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회주로 있는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 효림은 “정영 스님의 답은 조사 어록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늘 이렇게 살아 있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영은 세상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선사다. 출가에서 열반까지 35년 가운데 20여년을 경북 문경 김용사 금선대와 상주 남장사 중궁암 등 깊은 산에서 홀로 정진했다. 선방에서 살 때도 조용하기 그지 없는 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월남한 뒤 대학을 다니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북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남쪽에 혼자 남게 됐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다녔다. 전공은 수학이었다. 대학 졸업 후 상공부 특채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재직했으나 자유당 정권 시절 공무원들의 부패상에 절망해 사표를 내고 중·고교의 교사가 됐다. 그러다 용성 선사의 제자로 서울 대각사에서 ‘각(깨달음) 운동’을 펼치던 소천 선사의 설법을 듣고 그를 은사로 출가했다. 그에겐 오직 수행 뿐이었다. 신자도 두지 않았다. 금선대에서 지낼 때 산에서 길을 잃어 죽을 뻔하다가 목숨을 건진 한 보살이 유일한 신자였다고 한다. 말 없이 조용한 그의 미소를 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깊은 평화를 느꼈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그는 어떤 직위도 갖지 않았다. 한 때 태백산 각화사 주지를 맡았으나 수행 잘하는 제자를 그르칠까 우려한 은사가 당장 그만두라고 하자 그날로 주지직을 던지고 숨어버렸다. 세상에 ‘절대 안돼’ 란 없다
손가락질 받더라도 수행정신 잃지말라 강조
입적 전날 링거뽑고 돌아와 옷·물건 나눠주고 ‘공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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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아온 스님 가운데 가장 존경스러운 스님으로 정영 선사를 꼽으면 회고하는 효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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