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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30 16:50 수정 : 2005.09.05 11:26

한줄기 빛이 되어 어둠의 시대 밝혔다-한빛교회 유원규 목사

한빛교회
유원규 목사

서울 강북구 미아9동 달동네가 시작되는 언덕배기. 좁은 골목길 끝에 숨은 듯 서 있는 게 한빛교회다. 70~80년대 이 골목 입구에는 매일 경찰과 전투경찰 20여명이 지켜섰고, 정보요원들은 번득이는 감시의 눈길로 골목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여관이 들어설레야 들어설 수 없는 이 골목에 문익환·이해동 목사 등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감시하는 정보요원들이 묵는 여관이 있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 골목을 걸어서 한빛교회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시대였다.

유원규(55) 목사는 어둠의 시대에 한줄기 빛이었던 이 교회에서 드러나지 않는 내조자였다. 소박하기 그지 없는 목사실이 그의 조용한 성품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목포 연동교회에서 목회하던 그가 문익환·이해동 목사에 이어 한빛교회 담임을 맡은 것은 지난 84년 8월. 꼭 21년 전인 34살 때였다. 그가 부임하던 때도 골목길에선 경찰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고, 그 주에 바로 문 목사는 또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70~80년대 이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이 받은 선고형량을 합하면 무기징역을 빼도 무려 200년. 그야말로 감옥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선배 목사들과 신자들의 모든 상황을 감당하기에 그는 젊었다.

문익환·이해동 목사 활동…정보요원 감시 공작 극심
84년 담임맡아 교회 내조…선배 목사 신자 옥바라지

더구나 새 신자가 오면 반가워야할 교회에서 ‘저 사람이 왜 왔을까’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80년대 초 이 교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해 여신도회장까지 맡았던 ‘옥자’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 그는 90년대 ‘경찰의 날’ 행사에 경찰복을 입고 표창장을 받는 ‘여성 고위 경찰’이었다. 교회 가족들은 그 사람이 경찰 신분을 감춘 채 활동한 위장신자임을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서로 보듬어도 헤쳐나갈 수 없는 암울한 때 이처럼 서로를 믿을 수 없게 하는 상황은 늘 ‘정보기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 목사는 “하나님의 은총이 컸다”고 말했다.

“문 목사님과 이우정 장로님 등은 젊은 목회자인 저에게 교회를 믿고 맡겼지요.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과 이해동 목사님이 하는 일은 옳다는 신념을 가졌던 신자들이 제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주었지요.”

그토록 어려운 가운데서도 유 목사와 신자들은 뜨게질로 양말과 숄을 만들어 양심수들에게 들여보냈고, 바자회를 열어 모은 돈으로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이들은 민주정부가 들어서 이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의 감옥행이 그친 뒤에도 장기수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장년부 출석신자가 120여명인 작은 교회지만 유 목사와 교인들은 여전히 큰 빛을 나누고 있다. 교인들이 무의탁노인과 외국인노동자, 북한동포, 장기수, 탈북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1계좌씩 돕는 ‘작은 불꽃 운동’을 벌이고, 매년 추수감사절 때는 ‘열린사회북부시민회’와 함께 장애우 가정의 낡은 집을 수리해주고 있다.

주일 오후면 해직교수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양심수들이 석방되는 날이면 누가 말하거나 약속하지 않아도 모여들었던 낡은 예배당에서 유 목사가 치는 징소리가 울려퍼진다. 민중의 아픔을 보듬기 위해 스스로 고난을 감내하는 자들만이 전하는 울림이 가슴을 파고든다. 글·사진 조연현 기자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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