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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6 18:09 수정 : 2005.07.26 18:50

시원한 도봉산 바위 능선을 병풍삼은 망월사 누각 옆에 오래된 새집이 있다.

늘 수행자의 자세 되세기던 ‘돌탑 수좌’

30살에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대우받거나 내세우는 법 없어
제자들한테 “머리 만져보라”…주변에 약속한 날 속세 떠나

서울은 찜통 속이다. 화탕 지옥에 한 줄기 솔바람인가. 도봉산 쪽이다. 이보다 시원할 순 없다. 바위능선들을 병풍 삼은 망월사의 한 누각 옆에 오래 된 새집이 있다. 천중선원을 지켜보는 자리다. 새는 선원을 돌며, 명예도, 살심도 한바탕 벗어버린 납자(선승이 스스로 ‘납루한 자’로 낮춰 부르는 말)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1923년. 청년 납자가 망월사로 용성 선사를 찾아왔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젊은 납자는 대답 대신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

도인은 미물이 먼저 알아보고, 선지식은 상대가 입술을 떼기 전에 이미 눈빛과 걸음걸이만으로도 견처(깨달음)를 알아본다고 했다. 용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인곡(1895~1961)이 스승으로부터 견성을 인가받는 순간이었다.

전남 영광군 법성에서 태어난 인곡은 14살에 백양사로 출가했다. 그는 불연이 깊었다. 어머니의 동생, 즉 외삼촌이 백양사의 중흥조인 만암선사였다. 그는 선과 교에 모두 출중했던 만암의 회상에서 강원을 마친 뒤 참선 길에 나섰다. 팔공산 동화사에서, 예산 보덕사의 보월 선사 회상에서 정진한 데 이어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월, 혜월, 한암 선사와 법거량을 벌였다. 인곡은 한 번 자리에 앉으면 돌탑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정진했기에, ‘돌탑 수좌’로 불렸다.

용성의 깨달음을 잇는 법제자가 된 인곡은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을 연 용성을 따라 갔다. 그곳에서 ‘젊은 도인’의 탄생 소문을 들은 대중들이 인곡의 법문을 듣기 위해 그를 법상에 모셨다. 대중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젊은 도인의 입에서 어떤 법문이 터져 나올 지 주시할 뿐이었다. 1분, 2분, 3분….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인곡은 입을 열지 않았다. 주장자를 짚은 채 돌탑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인곡의 부동심으로 법당은 고요 속에 잠겼다. 이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인곡은 마침내 그대로 일어나 법상에서 내려왔다.

대중들 법문 청하자 “…” 침묵의 설법

이 자리에 있던 용성은 “이것이 참설법이며,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진리이며, 이것이 역대조사의 안목이니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 그리고 법계의 모든 영들이 안신입명하는 곳이다”고 찬탄했다.

인곡은 불과 30살에 호남제일선원인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이 됐다. 앳된 젊은 승려가 산중 최고 어른으로 추대된 것이다. 그럼에도 인곡은 대우받으려 한다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절 살림이 가난해 양식이 부족한데도 운문선원엔 그를 찾아 20여명의 선객이 몰려들었다. 그는 선객들이 참선하는 틈을 타 백양사에서 몸소 양식을 져 나르고, 나무를 하곤 했다.

조그만 몸집에 말 수가 없고, 늘 겸손했던 인곡은 계율이 청정하기 이를데 없었던 만암의 영향인지 ‘어른’으로 존중받으면서도, 늘 수행자로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한국 불교에 찬불가를 보급시킨 주역인 북한산 운문사의 운문스님(77)은 솔향 가득한 해인사 뒷방에서 “늘 머리를 만져보라”던 스승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삭발한 머리를 만지면서 늘 수행자임을 잊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인곡은 솔잎을 먹으면 피가 맑아져 혼침이 오지 않아 정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며 평생 솔잎 생식을 했기에 그의 방은 늘 솔향이 가득했다고 한다. 인곡의 제자로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선사는 그런 스승의 영정을 방에 걸어두고 ‘스승을 넘어서는 것’을 평생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 도인을 날짐승은 알아보았을까. 스님들이 공양 중 음식을 조금씩 모아 산짐승들에게 나눠주는 헌식 시간이면 까마귀와 까치들이 늘 인곡을 에워싸고 그의 어깨에 내려 앉곤 했다. 옛 <고승전> 책 속에서나 전해내려오던 현장을 본 승려들과 신자들은 놀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정릉 보림사 조실 묵산 스님(83)은 인곡이 열반하기 전 3년 간 해인사에서 시봉하며 ‘용무생사’(·생사없는 도리를 씀)의 장면을 보았다. 열반 전 12일 동안 단식을 한 인곡이 음력 7월 14일 “이제 속세를 떠나겠다”고 하자, 상좌 포공 스님이 “내일이면 선원 하안거가 해제하고, 우란분절(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재를 지내는 불교명절)로 좋은 날이니 내일 가시면 안 되느냐”고 했다. 인곡은 “좋고 나쁜 날이 따로 있느냐”고 했지만, 포공은 “큰스님의 경계는 그렇지만 미혹한 중생들이야 그렇지 않다”며 다시 간청했다. 혀를 차던 인곡은 “그렇게 하지”라고 답했다. 이 말이 온 가야산에 전해지자 주지 스님은 “노장이 아파서 정신 없이 하는 소린데, 이런 얘기를 소문내서 만일 내일 돌아가시지 않으면 무슨 망신이냐”며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인곡은 다음날 오전 8시 “이제 가노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란분절(8월19일)이 멀지않았다. 무엇이 화탕지옥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천도인가. 망월사 선방 위로 한 마리 새가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을 노닌다. 글·사진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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