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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2 17:31 수정 : 2005.07.19 16:59


천진한 도인…“모기도 잡지 마라”

전남 나주 금성산에 이르니 하늘 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과 땅과 계곡이 비로 인하여 함께 춤춘다. 우화(雨華)도인(1903~1976)의 환영식인가.

우화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수박을 들고 경내에 들어섰다. “아따 무겁게 뭔 이런 것을 사오시요. 글씨.”

적막한 경내에서 주지 일륜 스님(63)이 맞는다. 우화도인을 평생 시봉했고, 스승의 열반 뒤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수행하다 다시 스승의 자취를 쫓아 돌아온 그다. 마치 수줍음을 타는 여성 같은 표정이나 꾸밀 줄 모르는 진솔함은 스승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의 스승 우화는 한국의 선객들이 선사나 스님이라고 부르기보다 도인이라고 칭하기를 즐겨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전남 나주 다보사 선방에서 한철을 보낸 선객들은 티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같은 우화의 ‘천진’을 평생 잊지 못해 했고, 선원의 사랑방 격인 지대방에선 그의 일화가 늘 화제의 일미였다.

우화는 전남 담양의 성도(成道)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과 셋이서 살아가는데 아버지는 늘 우화를 못난이라며 미워했다. 그래서 소학교를 글씨도 깨우치기도 전인 3학년에 그만두어야 했다.

우화는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14살에 집을 나왔다. 발길 닿은 곳이 경남 함양 영각사였다. 그는 밥을 얻어먹으며 행자 노릇을 시작했다. 우화는 고달픈 행자생활 중에도 틈만 나면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못나고, 부모 복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 달라”고. 어느 날 꿈에 한 노승으로부터 “참선을 하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그는 참선 길에 나섰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배짱마저 없는 그의 삶은 수행처에서도 고달프기만 했다. 토굴에서 수행하다 병이 든 채 누더기를 입고 통도사를 찾아갔지만 걸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 변변한 은사도, 내놓을 문중도 없는 그는 선방에서도 문전 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공 선사를 찾아간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도 3번이나 방부(안거에 살겠다고 신청)를 거절당했다. 많은 식량을 탁발해 가서야 정혜사 선방에 들어간 우화는 한 번 온 공부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만공은 석 달간 한 철 안거를 마친 뒤 선방 납자들이 쓴 게송(깨달음의 시) 가운데 우화와 성철 선사의 것, 둘만을 인정했다고 한다. 우화가 부산 내원사에 이르자 경허-혜월의 법을 이은 운봉 선사가 그의 견처(깨달음)를 단박에 알아보고 법제자로 삼았다. 법(깨달음 또는 진리)을 전하고 받는 것 또한 꿈 속의 일이던가. 일륜 스님이 내보인 운봉의 친필 인가장엔 ’전법게’(법을 전함)가 아닌 ‘전몽게’(꿈을 전함)라고 쓰여 있었다.

소학교 3년 중퇴 뒤 14살 때 출가
평생 짚신신고 짚방석에서 좌선
새벽 2시 일어난 뒤 눕는 일 없어
고양이에게도 “화두 잘 챙기거라”

그 뒤 우화는 불교세가 미약해 ‘앉아서 굶어죽기 딱 좋은’ 나주에서 다보사를 30여년이나 지켰다. 아예 돈을 쓸 줄도 몰랐던 우화는 꼬깃꼬깃한 돈을 한장씩 두장씩 모았지만, 승려들이 “여비 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꾸어달라고 하면 두 말 없이 주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빌려간 것은 후생에서라도 부처님과 대중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철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우화는 절에 아무도 없어도 혼자 죽비를 치고 참선을 시작했고, 공양시간이 되면 발우를 폈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았다. 우화는 잘 때도 반드시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으로 누웠고, 요를 방석 크기의 4분의 1로 개어 위쪽만을 덮었다. 황소바람이 노승의 몸에 몰아치는 것이 안타까워 제자 일륜이 방에 들어가 요를 펴서 온몸을 덮어드리고 방을 나와 문틈으로 방을 들여다보면 스승은 얼른 요를 다시 4분의1로 접어 위쪽만 덮었다. 안락함을 멀리함으로서 경책을 삼은 것이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면 온종일 다시 눕는 일이 없었다. 또 평생 천방석을 두고 짚방석을 깔고 좌선을 하고, 짚신만을 신었다. 여름이면 모기약을 뿌리지도, 모기를 잡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름철 그의 모시옷은 우화의 피를 포식해 배가 터져 죽은 모기들의 피로 시뻘겠다.

이처럼 미물에게도 그는 평등하게 대했다. 이곳에서 키우던 고양이에게도 늘 “화두를 잘 챙기라”고 일렀는데, 고양이는 이를 알아듣는 듯 좌선 중인 우화의 무릎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이 고양이도 발정기가 되면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한번은 비구니 스님이 절에 오자 그에게 “고양이를 붙잡고 있으라”고 한 뒤, 초를 아기 고추처럼 만들어 암고양이의 ‘그것’에 넣어 문질렀다. 비구니 스님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지만 우화는 오히려 “왜 그렇게 놀란다요?”하고 의아해 했다.

발정이 나 발광하기 직전인 고양이에겐 그런 자비를 베풀면서도 우화는 정작 ‘여성’을 몰랐다. 짓궂은 도반들이 “정말 여자 맛을 한 번도 못 봤소?”하면 “여자를 어떻게 맛본다요?”하고 물었다. 또 짓궂은 비구니 스님들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그의 손을 잡으면 “어찌 비구니가 비구의 몸에 손을 대느냐”며 마치 성폭행당하기 직전의 여성처럼 놀라서 고함을 치곤 했다.

“때도 한참 넘었는디, 공양도 대접을 못하고 어쩔거나.”

공양주 보살 한 명 없이 손수 끼니를 해결하는 안빈한 수행자 일륜 스님은 안타까워하지만 우화의 ‘천진’이 허기를 때워준다. 우화는 세속 음식은 일체 입에 대지 않아 멀리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일주문을 부여잡고 “아이고, 배 고파 나 죽겄다”고 했다. 우화의 천진 법어인가. 일주문을 돌아 나서니 드디어 배가 꿈 깬 소식을 들려준다. “꼬르륵, 꼬르륵” 금정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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