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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4 17:25 수정 : 2005.06.14 17:25



경기도 의정부 호원동의 큰길을 벗어나면 도봉산 망월사까지 찻길은 아예 없다. 온전히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산길이다. 한 낮의 해는 뜨겁다. 한 잔 감로수와 시원한 빗줄기가 어찌 그립지 않을까.

이 산을 호령했던 ‘도봉산 호랑이’ 춘성 선사(1891~1977)는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서 태어나 13살에 출가했다. 19살 때였다. 스승을 찾아 설악산 백담사에 가자 때마침 긴 가뭄 끝에 폭우가 내렸다. 그런데도 스승은 골방에서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춘성은 스승을 향해 “이 좋은 날에 방안에 쳐 박혀 무얼 하느냐”고 힐난하고 옷을 몽땅 벗은 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선지식은 물론 일본총독부조차 어쩌지 못했던 스승 만해에게 그랬을 정도로 춘성에겐 넘지 않아야 할 선이란 없었다. 서슬 퍼런 시절 강화도 보문사로 그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씨에게 “입 한 번 맞추자”고 했던 그였다.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
이불 없이 방석덮고 정진
거침없는 욕지거리·파계
육영수씨에게 “입 맞추자”

전북 완주 수봉산 요덕사 법당에 춘성의 영정을 모셔두고 정진하는 선승 대선 스님(65)도 그 욕지거리로 춘성과 연을 맺었다. 1960년 어느 날 밤 망월사로 찾아가자 춘성은 “개 좆 같은 놈”이라며 그를 맞았다. 대선 스님은 그날부터 망월사에서 꼬박 10년 간 춘성 아래서 수행했다. 대선 스님이 빗길 5백여 리를 달린 정성에 40년 간 묻어둔 얘기 보따리를 푼다.

망월사엔 이불이 없었다. 춘성은 “이불이란 ‘부처와 이별’(離佛)하게 하는 것”이라며 이불을 몽땅 불태우고 잘 때 방석으로 배만 덥고 잠깐 눈을 붙인 뒤 일어나 다시 정진하도록 했다. 춘성은 밤 9시부터 1시간 가량 누워있었을 뿐 그 외엔 눕는 법이 없었다. 춘성은 자기 방이 아예 없었다.

젊은 시절 서울 대각사에서 당대의 선지식이던 용성 선사의 문하에서 10년 간 정진하기도 했던 춘성은 50살이 되어 뒤늦게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 선사를 만나 크게 발심했다. 그는 수행에서도 한계가 없었다. 수마(잠)를 이기기 위해서 한 겨울에 물항아리 속에 들어갔다. 한겨울에 찬방에서 눕지도 먹지도 않은 채 14일간 정진하기도 했다. 이 때 몸이 굳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놓아준 금침을 맞고 기사회생했다고 한다.

이렇듯 처절한 정진으로 화두(말 머리) 이전 소식을 일거에 중득한 춘성에겐 잘 꾸민 말도, 승복조차도 한낱 겉치장에 불과했다. 춘성은 절에서도 승복을 입지 않고 있을 때가 많았다. 입은 옷과 갈아 입을 옷 하나뿐이었던 춘성에게 신자들이 당시로선 고가인 양복을 해주곤 했다. 그러면 춘성은 그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중절모를 쓴 채 서울 시내에 나가 지인에게 맥주 한 잔 얻어먹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양복은 그의 몸에 이틀을 붙어있지 않았다. 당시만도 헐벗은 걸인들이 즐비하던 때였다. 그는 그들에게 새양복을 벗어주고 팬티차림으로 공중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한 밤에 절로 돌아오곤 했다.

그 때 망월사를 찾은 선승들이 보는 것은 파계요, 듣는 것은 욕뿐이었다. 그들은 잠도 편히 잘 수 없었고, 세끼 공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승속을 망론하고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예전에 비해 10배 이상 넓어진 망월사에는 지금 12명만이 하안거(여름집중수행)에 들어가 참선 정진중이지만, 앉을 곳조차 변변치 않았던 당시엔 40~50명의 선승들이 들끓었다. 춘성이 열반한지 30년이 다 됐으니 망월사엔 그와 인연 있는 스님이 없다. 하지만 그가 열반하자 몽땅 말라죽어버렸다는 망월사 주위 소나무는 다시 생기를 뿜고 있다. 솔바람에 더위를 식힌 것에 자족하고 하산하려는데, 뜻하지 않게도 ‘춘성의 인연’이 앞에 나타난다. 망월사에 일하러온 석공 정인훈(61)씨였다. 그는 60년대 초 16살부터 3년간 이곳에서 일하며 춘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990002%%춘성은 돈을 저축하거나 서랍에 넣어두는 법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줘버렸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춘성의 영향 탓인지 정씨에게도 욕은 욕이 아닌 모양이다.

그가 법당을 지을 때 쓸 참나무를 포대능선 위에서 베었다. 산림법 위반으로 춘성을 파출소로 끌고 간 경찰이 먼저 인적사항을 물었다. “주소가 어디요?” “어머니 보지요.” “뭐라고요! 본적이 어디요?” “아버지 좆물이요.”

어처구니 없어하던 경찰은 그를 내보냈다. 춘성의 욕법문에 견문이 툭 터진 한 노보살(절에선 여성불자를 보살로 일컬음)이 시집 갈 때가 됐는데도 소견머리가 좁아 터진 손녀딸을 일부러 춘성에게 보냈다. 처녀가 방에 들어와 앉자 춘성은 “네 작은 그것에 어찌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고 했다. 이 말을 지레짐작해 얼굴이 홍당무가 된 처녀는 방을 뛰쳐나와 할머니를 원망했다. 그러자 노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며 혀를 찼다고 한다.

무더위에 하산하는 일보다 더욱 답답한 것은 적당한 거짓과 위선이 당연한 듯 덮어써온 가면이다. 방문객을 위한 춘성의 자비인가. 포대능선 위에서 한 줄기 솔바람이 진검마냥 가슴을 시원스레 뚫는다. “야!, 개좆같은 놈아!”

도봉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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