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선사가 브이자를 그린 손을 든채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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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지식인이여 물어보라 강원도 오대산에 접어들면 물은 물대로 좋고, 산은 산대로 좋다. 월정사 주차장 계곡 위 금강교를 지나 오른쪽 산기슭으로 가면 만나는 호젓한 외딴집이 방산굴이다. 탄허 선사(1913~1983)가 머물던 자리다. 30일 월정사에선 ‘제1회 탄허대종사 선서함양 전국 휘호대회’가 열렸다. 탄허의 선필을 이으려는 5백여 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탄허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사서삼경을 중단 없이 모두 외울 만큼 천재였다. 그는 유학의 꽃인 주역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책을 살 돈이 없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김홍규는 김구의 독립운동 자금책이었으나 집엔 돈 한 푼이 없었다. 탄허의 환속한 제자이자 속가 사위인 서우담씨(66·교림출판사 대표)가 장모(탄허의 출가 전 부인)로부터 들은 얘기다. 아내가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탄허는 글방에 박혀 집에 오지 않았다. 마침내 아내가 문틈으로 엿보는데, 탄허는 미쳐 있었다. 한손엔 주역을 들고 한손으로 연신 무릎을 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탄허는 그 때 주역을 500번 탐독했다고 한다. 일체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발심한 탄허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꼽히던 한암과 3년 간 서신을 주고받던 끝에 21살 때 오대산에 이른다. 아내와 1남1녀를 두고 온 탄허는 도의 요체를 깨닫고 귀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대산 문수보살은 다시 보기 어려울 법기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탄허는 입산 뒤 3년간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별보궁에서 기도하며 참선 정진했다. 근기가 남달랐던 탄허는 철저한 정진 끝에 유학과 도학에 이어 불법을 단박에 꿰뚫었다. 이후 참선에만 몰입하는 탄허에게 스승 한암은 중국 당나라 위앙종의 시조인 위산·앙산 선사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스승 위산이 앙산에게 경을 보게 했다. 그러자 앙산은 ‘수좌들에게 일체 경을 못 보게 하면서 왜 제게 경을 보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다른 수좌들은 자기 일도 못한다. 그런 처지에 어찌 남의 일까지 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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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양주동 등에 장자 강의
9시 잠들어 한밤에 일어나 집필
6만 3천장 화엄경 원고 탈고 스승의 권유에 따라 탄허는 20대에 자신보다 14살 연상으로 훗날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선사와 탄옹 선사에게 화엄경을 설하기 시작했다. 해방 뒤 서울 남산 한국대학교에선 함석헌이, 상원사에선 양주동이 탄허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다. 자칭 국보로 거칠 것이 없던 양주동은 탄허보다 10년 연상으로 오대산에 와서 탄허에게 절을 받았다. 그러나 일주일 뒤 장자 강의가 끝난 뒤엔 오체투지로 탄허에게 절을 했다. 동국대로 돌아온 양주동은 강의 시간에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수도권에서 가장 불자들이 많이 모이는 한마음선원의 대행 스님, 능인선원의 지광 스님과 한국 불교 교학을 이끄는 각성·통광·무비·혜거 스님이 모두 탄허로부터 배웠다.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방산굴에서 탄허를 모신 혜거 스님은 서울 개포동 금강선원에서 빈 틈이라곤 없었던 스승의 삶을 전했다. 탄허는 밤 9시면 잠을 잤고, 첫잠이 깨면 11시건 12시건 어김 없이 일어났다. 잠시 신선법으로 몸을 푼 뒤 원고를 썼다. 혜거 스님은 스승이 한 번도 ‘바쁘다’며 사람을 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스승은 늘 하루 할 일을 새벽에 모두 마쳤기에 아침 이후생활은 덤이었다. 1960년엔 비구-대처승간 분쟁이 극심했다. 월정사에서 다음날이면 대처승들에게 쫓겨나게 돼 있어 서울에서 청담·숭산 선사가 대거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 이들은 탄허의 방에 모여 다음날 절을 지킬 일을 숙의했다. 자신이 조실인 절이 다음날 풍비박산이 될지 모르는데도 탄허는 9시가 되자 그 자리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모두 쓰러져 잠든 시간 첫잠이 깨자 일어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한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6만3천장의 화엄경 합본 원고는 이렇게 10년 간 그의 손끝에서 기적처럼 탄생해 세계 불교계를 경악케 했다. ‘한 나라와도 바꾸지 않을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스승 탄허의 유지를 이어 혜거는 서울 강남 자곡동에 땅 4천 평을 마련해 10년 간 두문불출하고 공부만 할 이들을 모아 공부 결사에 나선다니 탄허가 일으킨 파문이 다시 어떻게 커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탄허는 다른 고승들처럼 법상에 앉지 않고 백묵을 들고 칠판 앞에 서서 “천하의 지식인이여 와서 물으라”고 했다. 그리고 “묻지 않으면, 모두 안 것으로 알고 내가 물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수강생의 머리가 쭈뼛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역과 정역을 근거로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에서 미국 패배, 그리고 자신의 열반날까지 정확히 예언했던 탄허는 앞으로 한반도가 지구의 중심 국가가 될 것임을 예견했다. 방산굴 앞으로 다시 금강교다. 무엇이 과거-현재-미래의 다리를 잇는 금강 같은 지혜던가. 선과 교가 다한 곳에 탄허(呑虛·허공을 삼킴)가 웃음 짓고 있다. 오대산/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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