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
[내삶의 선물] 이중섭이 담뱃갑에 그린 복숭아 |
화가 이중섭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폐 절단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누구는 꼭 문병을 올 거야. 중섭이야 제일 먼저 달려오겠지.’
그러나 올 만한 사람은 다 병문안을 다녀갔는데도 친구인 중섭은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화가 나기 시작했답니다. 그는 아무리 번드레하게 말을 잘 한다고 해도 그 말 속에 등가량의 진실이 없으면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했고, 친구인 이중섭이야말로 모두 규격품만 있는 이 재미없는 세상에 시원한 물을 뿌려주는 살수차 같은 존재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이럴 수가? 중섭이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우정에 대한 불신이 친구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그 어두운 그늘은 친구의 아픈 몸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중섭이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나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자네가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네.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아도 자네만은 반드시 와줄 거라 믿었단 말일세.”
친구의 물음에 이중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친구가 누워 있는 병상 곁에 앉아 머리를 긁적거릴 뿐이었습니다. 그리다 이중섭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습니다. 담뱃갑 속지인 은박지를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는 이중섭이 내민 담뱃갑 속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걸 한 입 베어 물면 당장이라고 기운이 솟을 것처럼 탐스런 천도 복숭아였습니다.
“왜 이걸 먹으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고 하지 않아….”
이중섭은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때만해도 생계를 꾸려나가기조차 힘든 무명화가였던 이중섭은 작은 선물 하나 사올 돈이 없어 문병을 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무작정 찾아와서는 친구가 평소에 좋아하던 천도 그림으로 선물을 대신했던 것이지요.
이중섭의 말에 친구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이중섭이 내민 천도 하나, 작지만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진 우정이 병실 안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친구의 마음 속에 어두운 그늘을 지게 했던 불신과 미움까지 몰아냈지요.
등에 졌던 힘든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이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 그의 서재에 천도 그림을 걸어두었던 그 친구의 이름은 구상(시인,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구상(1919.9.28~2004.5.11))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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