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선사의 의해 보월의 법제자가
된 안면도 송림사의 동산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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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말고!”몽둥이 찜질 스승도 한때 글에 갇히니 보월이 꾸짖어 참선케
마흔 열반들자 만공 통곡 동냥중들과 떼로 몰려 다니던 그가 어느 날 홍성 월산암에서 하루 밤 잠을 자게 됐다. 그 때 월산암을 지키던 만공의 속가 형인 대은 스님은 보월에게 “일단 중이 되었으면 견성을 해야 하고, 견성을 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만공 선사를 찾아가라”고 충고했다. 그는 그 즉시 덕숭산 위 정혜사로 올라갔다. 힘이 장사였던 그는 디딜방아를 찧어 참선하는 수좌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겨우 말석에서 참선을 시작했다. 걸인 보월은 하루가 다르게 수좌(선승)로 변모해갔다. 어느 날 보월이 눈 앞이 툭 트인 듯하자 게송(깨달음의 시)을 지어 만공에게 갔다. 게송을 적은 종이쪽지를 한 손으로 받은 만공은 글을 읽지도 않은 채 다른 한 손을 내밀었다. “아니, 게송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것 말고!” 보월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을 또 내놓으란 말인가. 보월은 만공에게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채 방에서 쫓아나고 말았다. 스승 만공이 때려 부순 것은 보월의 몸뚱이가 아니라 아직도 그가 갇혀 있던 글과 깨달음이란 관념의 감옥이었다. 글은 전했지만 ‘글 밖의 소식’을 들려달라는 스승의 요구에 응대조차 못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였다. 만공과 같은 경허의 제자로 부산 선암사에 있는 혜월 선사 아래서 참선하던 운암 스님이 만공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부처님이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어느 마음에 점을 찍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만공은 “위음왕불 이전(천지가 열리기 전)에 이미 다 말했다”는 답을 쓰고 있었다. 이를 본 보월은 “도대체 누구의 눈을 멀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하고 계시냐”고 준엄히 묻고선 편지를 불태워 버렸다. 제자로부터 방망이를 맞은 격이었다. 충격을 받은 만공은 산 위의 누각 금선대에 올라 7일 동안 꼼짝 않고 용맹 정진했다. 그리고 내려와 보월의 손을 잡으며 “자네가 내게 10년 양식을 주었구나”라고 기뻐했다. 글에 갇힌 자신을 깨뜨려주던 스승이 글로서 다시 남을 옥 속에 안주케 하려는 것을 본 제자가 스승을 구해준 것이다. 제자의 가르침에 다시 자신을 내던질만큼 호쾌한 ‘위인’이었던 만공은 보덕사 조실 자리를 불과 30대의 보월에게 물러주었다. 그 뒤 보덕사엔 더 많은 선승들이 몰려들었다. 보월이 불과 40살의 나이로 열반하자 만공은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고, 대중 설법 도중 피를 토하는 듯 울며 애통해 했다. 보월은 만공에게, ‘지혜 제일’이었지만 붓다보다 더 일찍 열반한 사리불이었고, 공자보다 더욱 더 빛을 발했지만 너무도 일찍 꺼져버린 안회였다. 보월의 마지막 제자 동산은 “출가자보다 재가자가 더욱 더 참선을 잘 할 수 있다”며 움막 밖까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불성을 깨운다. 출가자와 재가자, 걸인과 부처, 스승과 제자가 둘인가, 하나인가. 안면도와 서해안을 따른 상경길이 산과 들, 호수와 바다를 가른다. 그러나 황혼녘 낙조가 물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던가. 예산/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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