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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6 23:06 수정 : 2019.10.06 23:06

1972년 <한국일보> 사진기자 시절 전화를 받고 있는 44살 때의 정범태 선생. 71년부터 5년간 함께 근무하며 배웠던 후배 전민조 기자가 찍었다.

[가신이의 발자취] ‘한국 사진기자의 전설’ 정범태 선생을 기리며

1972년 <한국일보> 사진기자 시절 전화를 받고 있는 44살 때의 정범태 선생. 71년부터 5년간 함께 근무하며 배웠던 후배 전민조 기자가 찍었다.
2019년 9월17일, 그날 도봉산을 오르다 전화로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받았다. 한달 전쯤 만났을 때 추석 지낸 뒤 선선한 바람 불면 집에서 ‘삼계탕이나 함께 먹자’ 약속했던 정범태 선배께서 이틀 전 홀연 떠나셨다니, 더구나 ‘가족장으로 지내고 주검도 병원에 기증해서 빈소도 없이 모든 것을 끝냈다’니. 더 이상 산을 오르지 못한 채 내려오면서 평소 했던 말씀을 떠올렸다. ‘망자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대로 실천하고 가셨다는 생각에 새삼 숙연해졌다.

젊은 시절 그림이나 조각 공부를 하려다가 군대 생활을 베트남에서 하면서 종군사진가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할 일은 사진이다’는 결심을 했다. 제대한 뒤 잡지사를 거쳐 들어간 곳이 <한국일보> 편집국 사진기자였다. 그때 정 선배를 만나 1971년부터 5년간 함께 일했다. ‘예술은 사회적 지적 변화 뿐 아니라 개인의 감수성과 성격의 영향도 받는다‘는 영국 예술평론가 마틴 레이퍼드의 말처럼, 정 선배가 사진을 찍는 모습부터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재주,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의 보도사진, 풍부한 현장 경험까지, 사진을 잘 모르던 내게는 매순간 감탄이었다. 그래서 정 선배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일부러 가까이 지내려고 무척 노력했다.

정 선배는 현장을 오래 경험한 사진기자로 꼽힌다. 그의 신화적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 4월18일 심야 ‘정치 깡패’ 이정재·임화수 등이 지휘했던 고대생 피습 현장 특종이었다. 불량배들이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휘둘러 40여명의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취재차 유리창까지 박살내는 바람에 사진기자들도 줄행랑을 쳐야 했던 살벌한 현장이었다. 하지만 정 선배는 쓰러진 학생들 틈에 잠시 엎드려 있다가 벌떡 일어나 사진을 찍었다. 그때 30여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정 선배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발광하는 후렛쉬의 섬광을 보고 <동아일보>의 홍성혁 기자는 ‘정 선배가 사진을 찍는 구나, 아 나는 망했구나, 싶어서 몸을 앞으로 옮겨 보려고 했지만 공포로 두 다리가 자석처럼 땅바닥에 붙어서 꼼짝을 못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렇게 용기 있게 찍은 정 선배의 사진은 이튿날 아침 당시 근무하던 <조선일보> 1면에 보도되면서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앞서 그해 구정 ‘서울역 압사 사고 현장’도 정 선배 특유의 예감으로 밤새 현장을 지킨 덕분에 건진 대형 특종이었다. 31명이 죽고 41명이 중상을 입은 사고 순간을 유일하게 단독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타사의 야간 당직자들이 파면을 당할 정도였다.

‘영상시대 백 마디 말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는 인식을 하고 있던 <한국일보> 창업자 장기영 사장이 그 특종 사진들을 눈여겨 보다가 전격 스카웃을 한 덕분에 정 선배와 나의 만남도 가능했던 셈이다.

? 1976년 <한국일보> 1면에 실린, 집중 폭우로 산이 무너져 21명이 사망한 ‘완주 무악산 기도원 사고’ 현장 항공 사진도 정 선배 특유의 임기응변으로 건진 특종이었다. 이날 기상악화로 항공 취재가 어려워 타사 기자들은 대부분 자동차로 접근하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 선배는 포기하지 않고 전주시청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담당 국장의 통화를 듣게 되었다. ‘미군 헬기에 도움을 청했다. 현장 시찰을 시장을 모시고 공설운동장을 갈 것이다’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공설운동장으로 직행한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미군 헬기가 도착하자 전주시장를 뒷따라 올라탔다. 그 순간 미군 조종사가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아이엠 베스트 폴리스 포토그래퍼’라고 답했더니, 조종사도 시장도 무사통과했던 것이다.

2017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배웅 인사를 하고 있는 말련의 정범태 선생. 사진 전민조 기자
정 선배는 그뒤로도 정년 때까지 여러 언론사를 거쳤지만 끝까지 신문 보도사진의 현장을 누볐다. 마치 보도사진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는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쳤고 유머가 넘쳤다. 절간처럼 침묵이 흐르는 공간에도 그가 나타나면 분위기가 확 바뀌곤 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세상을 희망적으로 보았다.

카메라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떤 목적으로 찍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 선배처럼 세상의 잘못된 폭력을 응징하기 위해, 세상을 바꿔 보려는 각오로 셔터를 누르면 같은 현장에서도 특종 사진이 나왔 듯이 말이다.

정 선배의 육신은 하늘나라로 올라 갔지만 영혼이 깃든 그의 사진은 영원히 남아서 대대로 볼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정 선배의 열정적인 사진은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부활할 것이다. 오늘도 그의 사진을 볼 수 있어서 큰 위안을 받는다.

전민조/원로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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