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01 11:26
수정 : 2019.10.0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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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재독 민주화운동가 ‘고 박대원 추모 모임’이 열렸다. 사진 정주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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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한국민주화에 헌신한 재독 망명객 박대원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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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재독 민주화운동가 ‘고 박대원 추모 모임’이 열렸다. 사진 정주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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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 고독한 영혼을 위한 이야기 모임이 있었다. 그는 지난 5월 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세상을 마감했다. 향년 79. 독일에 ‘고독은 나의 고향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분의 운명을 전하던 그의 여동생은 “오빠는 외로워서 죽었어요”라고 하며 다음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는 1968년 이후 51년간 한번도 이 땅을 밟아보지 못한 망명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1년 독일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으로 통일후의 독일을 모습을 둘러보러 간 적이 있었다. 짧은 독일어 때문에 한국대사관 쪽에서 수집· 번역해놓은 독일 통일 관련 자료를 보러 갔다. 그때 행정수도 본의 남쪽 도시 쾰른에 있던 대사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그때 이미 향수병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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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1일 별세한 박대원씨의 영결식이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근교 오버우어젤 장지에서 열렸다. 고인의 부인이 영정을 들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후배인 송두율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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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두 아들이 마련한 이날 이야기 모임에는 고인의 친구와 선·후배들이 함께했다. 이원재 전 경기대 교수, 김명곤 고전번역원 연구원, 김광수 전 한신대 교수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그의 인품을 ‘때맞춰 오는 비’(及時雨)같다고 추억했다. 사진가 정주하 백제예술대 교수는 영상물로 그를 회상하고 임진택 명창은 소리로 그의 혼을 위로했다. 서울대 철학과 동문인 이삼열 대화아카데미 대표는 1968년 독일로 유학 가는 비행장에서 그를 만나 현지에서 10여년 동안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만들고 함께 활동한 경험을 들려줬다.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독일 13개 도시를 돌며 현수막을 달고 인쇄물을 만들고 한인 동포들을 만나는 내내 그의 헌신과 성실함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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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3훨 1일 서독의 수도 본에서 유럽 한인들이 한국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박독재 타도하고 민주사회 건설하자"는 현수막의 글씨를 민주사회건설협의회 활동중이던 고 박대원씨가 썼다. 사진 송두율 교수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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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 직후여서 한국사람끼리도 정보부 요원이 아닌가 하며 의심하고, 빨갱이로 몰아 비난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여권의 체류 허가가 취소될까봐 늘 불안해서 가슴 졸였다. 한국의 가족들 또한 이들의 독일 활동 때문에 감시당하고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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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대원 추모 모임’에서 고인의 서울대 문리대 후배인 임진택 명창이 판소리로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 정주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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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독일 유학생들은 순수철학보다는 사회철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일신의 학문적 성취나 입신보다는 조국의 민주화와 남북 분단현실을 깊이 고민했다. 그들의 연민어린 눈으로 보기에, 조국은 3선 개헌·유신 독재·‘5·18’, 신군부 독재가 계속되는 어둠의 땅이었다. 그런 남북 관계에 대한 고민이 북한 탐구 의욕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유럽 유학생들의 향수와 탐구욕의 연장으로 일어난 북한과의 관계는 본국 정치의 필요 때문에 엄청나게 과대포장되곤 했고, 이들에게 반사적으로 알려져 심리적 압박과 족쇄가 되었다.
필자는 1967년 동베를린 사건의 곁다리에 걸려 조작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동베를린 사건으로 끌려온 분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간첩단 사건’이란 엄청난 죄명 아래 발표된 ‘죄상’은 고문으로 조작되고, 남북한 정보기관의 상호 과장이 더해져 사실처럼 발표된 것이었다.(1972년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김일성의 사회주의헌법이 이면의 야합으로 함께 진행되었 듯이). 1968년 터진 ‘통혁당 사건’의 주범격으로 알려진 사람은 구치소 안에서 필자와 함께 묶여가면서 “우리가 당신들을 모두 포섭했다고 북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이들의 말을 근거로 우리가 모두 북한에 포섭되었다고 발표했다. 물론 나는 그때 그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남북 독재의 적대적 공존은 수많은 사람을 소리 없이 망가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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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대원(오른쪽)씨는 1940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중고와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나온 뒤 1968년부터 오스트리아 그라츠대학을 거쳐 독일 쾰른대학에서 유학했다. 사진은 경북중 시절 교정에서 찍은 모습이다. 사진 정주하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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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독일 유학 무렵 20대 후반의 청년 고 박대원씨. 사진 정주하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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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열 교수는 재독 한국민주화운동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기억과 전망>(2015년 가을호·2016년 여름호)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이 분의 활동은 그의 헌신적이지만 조용한 성품 탓에 드러난 일보다 숨겨진 일이 많다. 독일 유학생의 민주화운동도, 또 이분의 활동도 흐르는 세월과 연륜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것은 놓쳐버린 세속적 성취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분의 관심과 활동은 훗날 환경문제와 같은 보다 큰 담론으로 옮겨갔지만 안타깝게도 마음 속에서 조국은 낯설어졌다. 한국이 상당한 정도로 민주화되었지만, 안타깝게 그리웠지만, 그의 마음 안에 그어진 조국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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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대원씨는 1968년 유학을 떠난 이후 반세기 넘도록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망명객으로 독일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말년 모습이다. 사진 정주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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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유럽에는 상당수의 심리적 망명 인사가 있다고 한다. 진정 민주화된 조국은 이들에게 대사면을 선포하는 금도를 명시적으로 보일 때 더 큰 민주 한국이 될 것이다. ‘고독은 나의 고향이다’란 독백은 맞지 않다. 고향은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 이야기하고 따듯이 손잡고 체온을 나누는 그런 본향이다. 대한민국은 고독한 영혼을 고독에 내버려 헤매지 않게 하는 그런 조국이어야 할 것이다.
이 분의 이름은 박대원(朴大源)이다. 따뜻했고 조용하게 열정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헌신했다고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그 영혼은 경계인의 경계를 넘어 하늘나라로 갔지만 다시 경계를 넘어 조국으로 귀환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영혼의 한국인에게도 조국이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 독일 아니, 인류의 거대한 유산인 괴테의 대표문장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잘못을 저지른다”(<파우스트> 제317행)라고 한다. 박대원도 허물이 있다면 노력의 부산물일 터이니 조국과 신이 그를 알아주고 껴안을 것임을 믿는다.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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