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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18 00:10 수정 : 2019.09.18 17:04

사진가 정범태 선생이 지난 2007년 <한겨레>와 인터뷰 때 카메라를 든 채 웃고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지난 15일 별세 뒤늦게 알려…향년 92
고인 유언 따라 빈소 없이 주검도 기증

사진가 정범태 선생이 지난 2007년 <한겨레>와 인터뷰 때 카메라를 든 채 웃고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로 꼽히는 정범태 선생이 지난 15일 새벽 5시50분께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92.

1970년대 <한국일보> 재직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온 후배 사진가 전민조씨는 17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고인의 뜻에 따라 주검은 가톨릭성모병원에 기증했으며, ‘외부에 알리지 말고, 빈소도 만들지 말라’는 유지를 받들어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뒤 지인들에게 알려 드린다”는 가족들의 부음을 공개했다.

1928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6년부터 1997년까지 40여년간 <조선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등 신문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다양한 현장을 기록했다. 그는 평소 두 대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신문 보도용과 개인용 사진을 특종 사진 여럿 장면을 역사에 남겼다.

1960년 4월18일 고려대생 피습 현장. 사진 정범태 기자.
특히 그가 1960년 4월18일 서울 천일백화점 앞 고려대생 피습 장면을 찍은 사진은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하야 직전 계엄령이 내려진 시내 거리에서 경찰의 총탄세례를 받아 동행한 운전기사가 숨졌으나 <에이피>(AP) 통신에서 사진기자가 사망했다고 타전하는 바람에 오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앞서 그해 구정 때는 한국철도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서울역 귀성객 압사 사건’도 특종이었다.

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 ‘결정적 순간’. 정범태 사진.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마약사범으로 군사법정에 서 있는 여인과 그의 어린 아들을 포착한 ‘결정적 순간’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리얼리즘 사진의 백미’로 꼽힌다. 이 사진은 61년 10월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국제사진전에서 10대 걸작으로 뽑히고, 62년 일본에서 발행된 <세계사진연감>에도 수록됐다.

2006년 펴낸 정범태 사진집 ‘한국춤 백년 1’의 표지.
고인은 1946년 국극사 창극명창 장영찬씨와 인연을 계기로 말년까지 60년 넘게 명인·명창을 기록해 ‘다큐멘터리 예술 전문 사진가’로도 영역을 개척했다. 사진집 <한국의 명무>(名舞) 시리즈(한국일보사), <한영숙-살풀이>(열화당), <춤과 그 사람>(전10권, 열화당), <한국춤 백년 1-2>(눈빛출판사) 등 역작을 남겼다.

그는 한국민족사진가협회 이사, 한국창작사진가회 회장, 대한언론인회 이사 등을 지냈다. 2011년 제비꽃 문화인 특별사진가상, 제25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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