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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15 19:08 수정 : 2019.09.15 20:09

[가신이의 발자취]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 선생의 영전에

2017년 8·15 광복절을 앞두고 서옥렬 선생이 북녘의 가족들에게 쓴 편지, 끝내 직접 부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옥렬 선생님, 보름달처럼 둥근 한 지붕 아래 오붓하게 가족을 만나는 추석 명절 때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모님과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남과 북 경계가 없는 하늘나라 ‘통일의 새’가 되어 훨훨 날아 가셨군요.

선생님이 쓴 ‘보내지 못한 편지’ 가슴에 품고 가셨지요. “사랑하는 당신! 내가 당신 곁을 떠난지도 어언 38년이 지났군요. 여보! 내가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러갔소. 수많은 세월동안 당신을 잊어본 일이 없소. 감옥에서 홀로 징역살 때, 그리고 앞으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도 잊을 수가 없소.” 선생님, 이제 사모님 소식도 하늘나라에서 듣게 되었지요.

선생님 인생의 황금기 30대·40대·50대를 송두리째 앗아간, 30년 세월을 고스란히 묶어두었던 대전교도소를 나오시던 1990년 9월29일, 그날을 회상하면서 피눈물로 쓴 기록도 다시 읽어봅니다. “나는 나왔다. 15척 담 밖으로 나왔다. 지겹고 지겨운 화장실 포함 0.968평 채 한 평도 안 되는 곳에서 만델라보다도 6~7년을 더 살고 30여년 만에 나왔다. 서약서를 쓰고 나왔다. 그런데 왠지 웬일인지 찜찜하다. 양심은 쓰리고 아프다. 아픈 가슴 달래본다. 30년의 내 인생을 앗아간 곳 감옥 속에서 밖으로 풀려 나왔다. 그렇다고 완전한 자유가 있을까? 아니리, 이제 빼앗긴 30여년 보상해야지. 이제 사람다운 삶 살아가리. 내 겨레 내 나라 위해 살아가리. 내 나라 내 겨레 위해 한목숨 바치리. 젊게 살아가리. 조국통일 위해 살아가리라.”

맞아요. 선생님은 구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젊은 청년처럼 살았습니다. 항상 단정한 모습과 조그마한 카메라를 손에 들고 사진을 찍어 주시면서 환하게 웃으며 유머가 많았던 멋진 분이었습니. 광주교회협의회(NCC)에서 설이나 추석 맞아 장기수 어르신 모실 때마다 한결 같았지요.

섬마을 ‘소년 울보’로 자랐지만 서울에서는 학문 탐구에 매진했고, 인민군 병사로 전쟁을 겪은 뒤, 영예로운 평양시민으로서 교사 생활을 할 때까지만해도 단란한 가정을 일구던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모순인 분단된 조국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961년 공작원으로 고향을 찾아 동생을 만난 뒤 다시 월북하려다 붙잡혀 “사형!” 여섯번의 구형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딱 멈춘 것 같았다는 말씀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잡힌 몸, 갇힌 몸, 빼앗긴 30년의 댓가는 고문과 협박으로 한 쪽 눈이 멀어 성치 않는 가운데 홀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탈장과 심장질환, 편두통, 관절염으로 발까지 온몸을 긁으며 분단의 아픈 세월을 겪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출옥해서도 ‘창살 없는 감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사셨습니다.

‘죽어도 산다’ 친필로 써 주신 글자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요양원에 계실 때 광산구청장과 함께 팥빙수를 그토록 맛잇게 드셨던 모습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 이제 통일의 새가 되어 자유로이 부모님 묘에 엎드려 인사를 올릴 수 있겠지요. “불효소자 용서 하소서. 소자 조국과 민족 앞에 남긴 것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끄럽게는 안 살았습니다.”

맞아요, 선생님에게 죄가 있다면 조국을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부디 고문도 김옥도 분단도 병도 없는 그곳에서 안식 하소서. 만날 때마다 잡아주셨던 따뜻한 손 기억하며 마지막 인사 드립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샬롬 2019년 9월 14일.

장헌권 목사·서옥렬선생 송환추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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