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08 20:20
수정 : 2019.07.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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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병원 검진하러 서울 온 김에 통일문제연구소를 방문해 백기완(왼쪽) 소장과 함께 한 고경생(오른쪽) 선생. 고인의 마지막 인사가 됐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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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제주 민중운동가 고경생 선생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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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병원 검진하러 서울 온 김에 통일문제연구소를 방문해 백기완(왼쪽) 소장과 함께 한 고경생(오른쪽) 선생. 고인의 마지막 인사가 됐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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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화의 불길이 온 강산을 뒤덮을 즈음 둘레의 동지들이 고경생씨 더러 “제주에서 외로운 민중 후보의 깃발을 들라”고 했더니 “나는 깃발을 들 자격은 없다. 차라리 깃대가 되면 몰라도…”, 그래서 민중 후보의 깃대가 된 아, 고경생 선생.
며칠 뒤 만나니 얼굴엔 갖은 얼룩이 져 있고 가래침도 덕지덕지해 어쩐 일이냐 물으니, 이참은 우상이 판을 치지만 차츰 제주의 참모습이 벌컥 일어난다고 하더니 대통령 선거에서 끔찍하게 참패하자 서울로 택배를 보내왔다. 열어보니 제주에서도 보기 드문 붉은홍삼(해삼) 두 마리다.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어 마을 사람들한테 한 점씩 돌리고선 붓을 들어 ‘활활’이란 두 글자를 써서 제주로 부쳤다.
“이것 봐 고경생, 홍삼은 없어 못 보냈네. 글씨가 마음에 안 들면 밑씻개라도 하시게.”
그 뒤 몇 해 있다가 무슨 말을 해달라고 해 제주엘 갔더니 왁자지껄한 뒤풀이에 고경생도 낑겨 있어 자리를 옮겨가 앉았는데 슬며시 일어나 나가버린다. 가슴이 섬짓했지만 내가 나를 꼬집었다. 내가 누구인가. 담을수록 커가는 그릇 ‘바라’라고 하질 않았던가. 그런 내가 삐치다니 무어든지 다 담으란 말이다. 욕지거리든 개나발이든 헐뜯기든 칭찬이든 깽판이든 막판이든 다 담으라 이 말이다. 다 내 것으로 새길 터이다 하고 일어나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뭔 말이든 한축 내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다 사람의 것으로 한다는 ‘바라’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고경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조그마한 씨갈이 텃밭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한다. 한평생 제주대 박물관과 언론·출판센터에서 교직원으로 일하다 2010년 건강 악화로 명예퇴직한 뒤였을 게다. 나는 대뜸 붓을 들어 ‘한마음’이라고 써서 제주도로 보냈다. 그 뒤다. 여러 술(번) 글월이 날아왔다. 제주에 오는 길이 있으시면 꼭 한 술 들러 가시라고. 내 어찌 못하랴. 비행장에서 내리자마자 강연을 마치고 곧바로 ‘한마음’으로 달렸다.
작은 텃밭에 나무와 꽃으로 한가득 심어놓고 오막살이도 하나 지어놓았다. 얼기설기 나무로 엮어 만든 오막살이에 누워 한 숨 푸욱 자고 일어나며 우정을 다졌다. 그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자며 ‘한마음’이란 텃밭만 남기고 지난달 30일 예순다섯해 세상살이를 마치고 조용히 떠났다. 말기암 환자의 마지막 치료도 거부하고 떠났다. 그 사람 고경생.
얼굴이 화끈거려 며칠 동안 잠자리가 불편했다. 고경생은 그래도 한마음이란 텃밭을 남기고 떠났다. 그런데 백기완이 너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아니다, 남길 생각일랑은 아예 하질 말거라. 마지막 순간까지 해방통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 는데 있는 힘을 다 바치리라 남김없이 바치리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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