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6.02 22:24 수정 : 2019.06.03 14:47

부친 해리 홀트-원경선 선생 ‘인연’
1958년부터 두 가족 친척처럼 지내
농사지은 ‘고구마밥’도 나눠 먹고
보호시설 떠나게된 고아들 맡기도

[가신이의 발자취]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을 그리며

2012년 4월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열린 원경선 풀무원 원장의 백수연 때 말리 홀트 이사장이 축하 인사를 하고 있다. 두 집안은 1950년대 후반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왼쪽부터 말리 이사장,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 원경선 원장과 사위 김준권 평화나무농장 대표. 사진 풀무원 제공
홀트아동복지회의 말리 홀트 이사장이 지난달 17일 우리 곁을 떠났다. 사실 ‘이사장’이란 직함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해리-버다 홀트 부부의 6남매 중 셋째이자 둘째딸로 미국에서 간호대를 막 졸업한 1956년 21살 때 한국에 왔다. 그렇게 84살로 떠나기까지 60여년 동안 고아와 장애인, 그리고 미혼의 한부모들을 돌봐왔다. 무엇보다 그는 1967년부터 말년까지 입양이 어려운 장애아들을 위해 만든 홀트복지타운에서 중증 장애인과 한방에서 가족처럼 지내며 ‘말리 언니’, ‘말리 누나’라고 불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막 끝났을 때 미국 오리건주의 농장주였던 해리 홀트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가 와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은퇴하면 요트를 사서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꿈꾸던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너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시면 열심히 일해서 내 가족을 부양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다시 살아났을 때 그는 남은 생은 어떤 형태로든 남을 도우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1954년 어느 날 홀트는 마을에서 상영하는 한국전쟁 기록 영화를 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폐허의 모습과 전쟁고아들의 처참한 모습들이었다. 그는 그 아이들을 몇 명이라도 데려다 기르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1955년 10월 그에게는 이미 여섯 명의 친자녀가 있었는데도 8명의 전쟁고아를 미국으로 데려가 길렀다. 이듬해 홀트 부부는 전 재산을 팔아 한국으로 와서 고아원을 열었다. 특히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일반 고아원에서는 감당할 수 없다며 직접 돌보기로 했다. 그래서 딸 말리에게 한국에 와서 우선 3개월 만이라도 도와달라고 했다. 그 석달이 한평생이 됐다.’

말리 홀트는 간호사로 1956년 부모를 돕고자 잠시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평생토록 헌신했다. 1959년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말리 홀트의 모습이다. 사진 홀트아동복지회 제공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후반 어느날 말리 언니가 지적 장애인 소년 2명을 부천 도당리의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18살이 되면 시설을 나가야 하는 것이 법이라서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는 없지만 사회로 나가기에는 어리고 능력도 없는 청소년에게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2명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 2명의 소년들은 우리 7남매 형제들을 누나와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말리 언니의 이야기를 하려면 ‘해리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리 홀트와 내 아버지 원경선 선생은 1950년대 중반 홀트아동복지회 설립 초기부터 막역한 사이여서 어릴 때부터 두 가족이 친척처럼 지냈다. 그래서 말리 언니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늘 내 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했던 것이다.

1964년 해리 홀트가 별세한 뒤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을 맡은 부인 버다 홀트(가운데)와 어머니를 이어 2000년부터 이사장이 된 말리 홀트(오른쪽)도 종종 원경선(왼쪽) 풀무원 원장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곤 했다. 사진은 1980년대 중후반쯤으로 보인다. 사진 풀무원 제공
아버지의 회고록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유재현 지음·한길사)를 보면, 아버지는 1955년 해리 아저씨가 맨처음 한국에 온 직후에 만났다. 미국에 계실 때 활동했던 형제(브레드린)교단을 통해 해리 아저씨의 어머니가 ‘아들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첫 인상이 썩 좋지 않아 인사만 하고 나왔던 아버지는 1958년 ‘그 사람이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운영하는 녹번리의 고아원으로 병문안을 갔다가, 장애 고아들을 돌보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처음으로 마음이 통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때 부천에 있던 풀무원 농장에서 서울로 주일예배를 다녔는데, 예배가 끝나면 홀트고아원에 가서 사흘씩 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간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일을 맡아 했고, 75년부터 4년간은 홀트양자회 이사로 도왔다.

해리 아저씨가 혼혈인 고아들을 차에 가득 태우고 와서 우리 집에서 놀게 하고 아버지와 마당 한켠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어린 아이였던 나는 그 아이들이 미국에서 온 줄 알았다. 1964년 해리 아저씨가 돌아가신 뒤 홀트아동복지회를 운영하던 부인 버다 홀트 여사가 자신이 쓴 <동방의 아이들> 책을 아버지에게 보내주었다. 그 책에는 고아들을 먹일 양식이 떨어졌을 때 해리 아저씨의 하소연을 듣고 아버지가 우리 텃밭의 고구마를 캐다 먹이도록 해서 어려움을 넘겼다는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그 고구마는 우리집 겨울 식량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겨우내 쌀을 조금 넣고 고구마를 썰어 넣은 고구마밥을 지어 우리를 먹였다.

해리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이 미국으로 모셔가려 했으나 아버지가 ‘홀트는 한국의 아이들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고 설득했다. 미국에 머물다 급히 나온 부인이 ‘미스터 원의 말이 맞다’고 하여 해리 아저씨는 일산 홀트동산에 묻혔다. 장례 뒤 미 대사관에서 연 추도식에서 아버지는 추도사를 하기도 했다.

이번에 말리 언니의 빈소에서 우리는 미국에서 온 친동생 린다를 만나 서로의 추억과 인연을 나누며 함께 애도했다. 말리 언니는 생전에 늘 “가정을 잃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마음껏 사랑받을 수 있는 가정이라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실천했다. 그렇게 ‘해리 아저씨’처럼 한국인으로 한국땅에 잠들었다.

원혜덕/평화나무농장 농부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