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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2 17:33 수정 : 2005.02.02 17:33

그리던 동무 박재삼 곁으로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낙화〉 앞 3연)

원로 시인 이형기씨가 2일 오전 10시 20분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11년 전에 찾아온 뇌졸중이었다. 향년 72.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진주농림 5학년이던 1949년 촉석루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당시 2등인 차상에 오른 이가 동갑내기인 박재삼이었다. 시인은 이어 이듬해 잡지 〈문예〉를 통해 서정주의 추천으로 정식 등단한다. 만 17살의, 기록적으로 어린 나이였다.

초기 이형기 시인의 시세계는 자연을 응시하는 가운데 자아와 존재의 궁극을 추구하는 전통 서정의 계보에 속했다. 조락와 소멸의 운명을 수긍하는 의젓한 태도를 친숙한 가락에 얹어 노래하는 모습은 시인의 생물학적 젊음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대표작 〈낙화〉와 함께 첫 시집 〈적막 강산〉(1963)에 수록된 〈비〉에서도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누구나/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풍경은 정좌하고/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나를 에워싼 적막강산/그저 이렇게 빗속에 저문다.”(〈비〉)

시인은 창작은 물론 평론과 시론 등의 분야에서도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964년 무렵에는 김우종씨 등을 상대로 순수·참여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시인의 논지는 순수문학 역시 그 자체로 벌써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므로 그를 두고 ‘정치가 부족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 서정으로 출발한 시인의 시세계는 70년대 이후 도발적·모험적인 면모를 보이며 급격하게 변해 간다. 상투성과 모방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새로움과 시적 방법론의 갱신을 추구한 결과 그의 시는 서정주의에서 모더니즘 쪽으로 자리를 바꿔 앉은 것처럼 보였다.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병석에서도 창작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다. 지난 98년에는 투병 중에 쓴 시와 잠언을 모아 시집 〈절벽〉을 묶었다. 거기서 시인은 소멸의 운명과 맞서 있는 단독자의 고독과 결의를 아득한 슬픔에 버무려 이렇게 노래했다. 그것은 초기시 〈낙화〉의 승화이자 완성과도 같았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높게/날카롭게/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아아 절벽!”(〈절벽〉 전문)

같은 시집에 실린 시 〈이름 한번 불러보자 박재삼〉에서 “이름 한번 불러보자/아아 박재삼!/이왕 갔으니/내 자리도 네 가까이 하나 봐다오”라 했던 시인은 이제 비로소 먼저 간 동무 옆으로 떠나갔다.

시인은 〈서울신문〉 〈대한일보〉 〈국제신문〉에서 기자와 논설위원,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모교인 동국대 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한국문학가협회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문학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은숙씨와 딸 이여경씨, 사위 김태윤(한국와이어스 대리)씨가 있다. 장례식은 4일 오전 9시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성당에서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02)929-4099.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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