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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2 19:01 수정 : 2016.10.04 14:25

[토요판] 하나와 진이의 갈등 속으로
(4) 장애인 광화문 농성장 4년

“다들 장애인 비례대표 의원실만 찾아가라고 하던데요.” 지난 4일 서울 광화문역 지하도 농성장을 찾은 장하나 전 의원에게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가 “의원도 보좌관도 전장연은 잘 안 만나준다”며 장애인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낮은 의식 수준을 토로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는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할 무렵에도 젊은 시절의 방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가난한 홀어머니를 지독하게 괴롭혀 드렸다는 뜻이다.

졸업 직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처음 몇 달 동안은 스물여덟 살짜리 알바생으로 지내다가, 아는 선배의 부름을 받아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상근활동가는 아니었고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이동지원(휠체어 리프트 차량 운전), 장애인야학 교사 등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뛰면서 일한 시간만큼만 돈을 받는 조건이었다. 알바는 알바인데 보람 있는 알바랄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 진짜 가고 싶은 길을 찾을 때까지 임시로 머물기에는 더없이 좋아 보였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처음에는 비장애인인 내가 장애인들을 ‘돕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도움을 받은 건, 아니 구원을 받은 건 바로 나였다.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질식할 것 같았던 그날 밤

그 시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나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마치 록스타처럼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우라’를 뿜었다. 그와 얼굴 맞대고 일 얘기를 하고 있노라니 내가 진짜 국회의원이 된 게 맞구나 하고 실감하던 때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2012년 8월, 제19대 국회 임기 초반의 일이다. 서울 광화문역 지하통로를 오늘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이 자리잡던 첫날이었다. 또 누군가 다치거나 죽지는 않을까 하며 서울지방경찰청, 서울시,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닥치는 대로 정신없이 연락하던 기억도 되살아난다. 당시에는 진짜 초짜 국회의원이었기에 그런 비상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국회의원 직권이라는 커다란 무기(?)를 손에 쥐고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장애인 활동가들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평생 죄스러울 것인가. 밤새 그런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너무도 무서웠다. 모든 것이 처음이던 그날은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마치 질식할 것 같았다. 임기 내내 그와 같은 비상상황은 비일비재했고, 국회의원 직권이 때와 장소에 따라 한없이 하찮아짐을 반복적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광화문에 농성장이 설치된 지 곧 만 4년째가 된다.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이 4년 동안 노숙농성을 하다니 대단하기도 하지만, 이 무기한 농성을 방치하는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정치, 대한민국 사회는 또 얼마나 끔찍한가.

사실 나 역시 국회에 몸담고 있는 동안 어떻게 이 무기한 농성을 마치게 할 것인지, 즉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어떻게 폐지시킬 것인지 제대로 다뤄보지 못했다. 국회 정론관 점거 농성 때나 장애인 열사 추모제, 장애인 영화제, 각종 집회 참석 및 길거리 강연까지 몸으로 때우는 일은 요청받는 대로 출동했지만,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도 우리 의원실에 법안 발의 등 정책적인 연대 요청은 한 일이 없다. 나의 활동 상임위원회가 보건복지위원회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4일 낙선하고 나서 처음으로, 꽤 오랜만에, 찾아간 광화문 농성장에서 박경석 대표를 만나 이런저런 궁금함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일 이야기 외에 다른 대화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국회의원인 동안 평생 만나보지 못할 악인도 많이 보았지만 반대로 정말 좋은 사람들, 존경스러운 분들을 더 많이 만났다. 그런 사람들과 차도 마시고 밥도 같이 먹고 때로는 술도 한잔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값진 영감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국회의원 장하나는 어리석게도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사치라고 느꼈었다. 이제야 깨닫는 바다.

4년 전, 19대 국회의원 임기 초반
광화문에 장애인 농성장 들어서
복지위 소속 핑계로 소홀했던가
얼굴 맞댄 박경석 ‘전장연’ 대표
“다들 장애인 의원 찾아가라더라”

유엔이 제정한 장애인권리협약
“사회적 환경 고려해 규정” 명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뜻
장애인 권리에 눈감은 사회는
비장애인 권리에도 둔감하다

-무려 4년간의 노숙농성이다. 역사적인 대중투쟁이지만, 정치권과의 협업은 부족해 보인다. 정치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정치권과 일부러 거리두기 한 적은 없다. 어차피 모든 건 정치인데 거리를 두면 우리만 손해 아닌가. 정치투쟁과 대중투쟁은 별개이고, 어느 하나를 일부러 소홀히 하진 않았다. 19대 국회 당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안은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었고, 정의당에서 부양의무제 폐지 법안(공동행동 안)을 발의했지만 복지위 소속 의원이 없어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장애등급제 폐지 법안은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여러 의원을 접촉하다 보면 동의하는 의원이 있지 않았을까? 우리 의원실을 활용했어도 될 텐데.

“국회의원도 보좌진들도 전장연은 잘 안 만나준다. 이유를 모르겠다. 장하나 의원은 복지위가 아니라서 접촉하지 않았는데 다른 상임위 사안도 다룰 수 있나? 여러 의원실을 접촉했지만 공통적인 반응은 새누리당의 김정록 의원, 더민주의 최동익 의원실로 가보라는 거였다. 장애인과 관련된 정책은 장애인 비례대표 의원실에서만 다룬다는 편견과 선입견이 가장 큰 벽이다.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4년 농성의 성과가 있다면?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한 여론이 돌아섰다. 처음에는 ‘왜 폐지해야 되냐’는 반응이 많았는데, 지금은 등급제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무엇보다 4년 동안 농성장을 지켜온 장애인 당사자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공고해졌다는 게 성과다.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1급 장애인이고 수급권자다. 이들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때문에 고통받는 2등급 이하 장애인들, 수급권이 없는 장애인들을 위해 싸우는 이유는 보편적인 인권을 위해서고 계속되는 죽음을 막기 위해서다.”

-정치권과 정부의 문제는 뭔가?

“‘송파 세 모녀 사건’으로 세상과 정치권이 시끄럽다가도 ‘늘 그렇듯’ 그러다 말았다.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립서비스(말치레)로 모면하는 정치권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사건 이후 수급 조건은 완화됐지만, 복지예산을 늘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눈속임이다. 복지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태도를 보면 그 어떤 정권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잔인하고 야비하다. 이명박 정권 때보다 예산은 늘었지만 물가 인상에 따른 자연증가분일 뿐이고, 복지 부정수급 신고포상금제를 도입해 사회적 약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등 악질적이다. 활동보조를 24시간 지원하겠다는 자치단체가 있어도 중앙정부 협의사항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지원을 막는다.”

장하나 전 의원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지난 4년간의 농성 기록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등급제 폐지는 민주주의 근간 놓는 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장애등급제 폐지 법안을 발의하지 못한 사실이 너무 아쉽게 느껴졌다. 국회의원 시절 이번처럼 박 대표와 한두 시간이라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면, 장애등급제 폐지 이슈를 제도권으로 끌어오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때늦은 미련이었다.

12년 전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변했고, 삶을 사는 자세도 변했다. 글과 말이 아니라 활동가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물든’ 것이었다. 나 자신이 겪는 차별, 내가 빼앗긴 권리에 눈을 떴다는 뜻이다. 나의 처지, 나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시절의 나야말로 장애인이었다. 물론 여전히 내 눈을 가리는 장애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지만, 그 시절 이후 내 영혼은 훨씬 자유로워졌고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 관련 법과 제도는 온갖 차별과 낙인이 일상화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애등급제는 물론이고 ‘장애등록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 장애인복지법 제2조를 보면 장애인이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정의되어 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확연하다. 협약에 따르면 장애란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개념으로서 장애인 개인의 손상과 더불어 타인과 동등하게 사회에 완전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저해하는 태도 및 환경적인 장벽 간의 상호작용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즉 장애는 의학적인 소견과 함께 개인이 처한 사회적인 환경을 고려하여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개념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 또한 지대하다. 한국의 경우 등록 장애인은 전체 인구의 약 4.5%이지만, 영국은 국민의 약 20%를 장애 인구로 간주하고 있다.

다른 예로 미국은 비만인 관련 제도를 장애 정책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고, 스웨덴은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사회생활에 불편을 겪는 이주 외국인의 문제도 장애 정책의 하나로 다룬다. 노약자와 임산부가 겪는 고충·불편도 생애주기에 따라 자연 발생하는 장애로 본다. 당사자가 참고 견뎌야 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겪는 장애(외부의 장애물)를 제거할 의무가 정부에 있다는 의미다. 장애등록제는 장애인·비장애인 간의 불필요한 구분과 차별을 만들고, 결과적으로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제도다.

사실 장애등록제를 둔 나라는 극소수다. 한국의 장애인 정책은 등록 장애인을 1~6등급으로 분류하는 데서 출발한다. 예컨대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제도를 시행할 때 등급마다 활동보조 서비스 사용시간을 정해놓고 일괄 적용하는 방식이다. 같은 등급의 장애인들이 다 같은 서비스 유형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정부는 수요에 따른 공급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시혜를 베풀고 있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국민 다수의 인식도 그리 다르지 않다. 장애인의 권리에 둔감한 사회는 비장애인의 권리에도 둔감하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오인하고 개인의 ‘노오력’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행을 자초하게 만든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투쟁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인권 일반, 민주주의 근간에 대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국가장애보험계획(National Disability Insurance Schema)은 수요에 따른 공급을 구현하고 있다. ‘○급 장애인’이라는 낙인 없이, 사용하기 원하는 장애인 지원제도나 서비스를 신청하고 적격 여부를 판정받으면 된다. 물론 판정 과정에 당사자 참여를 보장받고, 판정 결과에 대한 불복 절차와 서비스 평가 제도도 수립되어 있다. 또한 어느 기관에서 서비스를 받을지에 대한 선택권이 당사자에게 있고, 서비스 계획 수립도 당사자와의 협의를 통해 이뤄진다. 이 정도가 되어야 권리의 주체답지 않은가. 노인 당사자가 운영에 참여하는 노인복지관,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장애인 복지관, 청소년이 만드는 청소년 복지관이 과연 과도한 주장인지 상식적인 요구인지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1960년에 태어나 1983년에 중도장애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를 당연하게 여겼다. 살기 싫었다. 한국 사회가 겉으로는 장애인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대하는 듯하지만 속으론 혐오한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운동 활동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장애인이 된 이후 5년간 매일 죽네 사네 하다가 1988년에 서울장애인복지관에 직업훈련을 받으러 갔다. 거기서 장애인 운동 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1993년에 노들장애인야학 창립멤버로 장애인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행복하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지금 일본에서 중증장애인 안락사 논쟁이 일고 있다. 중증장애인은 과연 살처분의 대상인가? 나도 처음에는 나 자신을 무능한 존재로 봤고 죽음도 생각했다. 가족의 짐이 되기 싫었다. 지금의 나는 보호 대상도 아니고 누군가의 짐도 아니다. 투쟁의 과정 자체가 행복하다.”

평생 싸우다 갈 수도 있다

내가 맞장구쳤다. “사는 맛이 있죠! 사는 맛이 다르죠.” 이십대 후반에 장애인 인권단체에서 일하면서 나에게 생긴 변화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사는 맛’을 느꼈다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이 나라의 주인이란 생각.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여전히 사랑과 보호의 대상으로 산다는 것…. 아마 평생 싸우다 갈 수도 있다. 뭐 어떤가. 맛있으면 됐지. 차별에 저항하라! 광화문 농성장의 슬로건이다. 간결하고 적확하다.

▶ 눈물 깃든 현장이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성과 합리가 아닌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갈등 공간이 전국에서 부스럼처럼 솟아 가라앉지 않습니다. 해법을 찾지 못한 갈등이 오래 묵어 삶을 곪게 하는 사태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19대 국회의원 장하나·김광진씨가 갈등의 현장을 찾아갑니다. 청년 비례대표로 정치를 경험한 두 전직 의원이 현장 속에서 정치를 성찰하며 현직 국회의 역할을 고민합니다.

장하나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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