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눈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를 그려낸 시각장애인 4명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화동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시작한 ‘향기로 기록된 감각의 단편-프라고라마(Fragorama)’전의 ‘향기로 채워진 그림’ 앞에 앉아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박상영, 박주영, 김두섭, 김연희.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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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맹학교 재학·졸업생 ‘향기 전시회’
‘잔잔하고 기분 좋은 살냄새’, ‘비누칠한 바비인형’, ‘말려놓은 떡에 곰팡이가 핀 냄새’, ‘껍질을 깎고 오래 놔두었을 때의 사과’, ‘뜨거운 열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차.’ 시각장애인들이 말로 그려낸 향기는 새롭고 아름다웠다.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자리잡은 갤러리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인 미술 교육과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곳에선 지난 2월 서울맹학교를 졸업한 김두섭(19)·박상영(20)씨, 이 학교 3학년인 김연희(21)씨와 박주영(18)양이 지난 1년간 ‘조향 수업’을 듣고 만든 ‘향기’들이 전시되고 있다. 4일 시작한 전시회 이름 역시 ‘향기로 기록된 감각의 단편’이다. 관람객들은 하나의 향을 만드는 데 사용된 30개 향료의 냄새를 직접 맡아본 뒤, 시각장애인들이 이 향기를 어떤 식으로 느꼈는지를 직접 설명하는 글을 보고 그 감성에 놀라워했다. 시각장애인들의 느낌은 눈으로 정보의 상당 부분을 얻는 이들의 것과 달리 개성적이고 때로는 더 섬세하다. 벽에 걸린 캔버스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바탕 그대로다. 대신 ‘향기로 채워진 그림’이라고 쓰고 그 밑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붓꽃이 있는 아를 풍경’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하얀 캔버스가 머금은 다채로운 향기에서 푸른 밤하늘과 보라색 붓꽃 풍경이 느껴진다. 벽에 걸린 흰 캔버스 배경으로고흐의 ‘별밤’처럼 싱그러운 향
깨끗하고 하얀 겨울 향 등 표현
관람객들 섬세한 감성에 ‘탄성’ 1년간 조향 수업 도운 김아라씨
“안마 아닌 다른 길 보여주고파” 이들은 ‘향기 교육 아티스트’인 김아라(31)씨의 도움을 받았다. 향기 연구소 ‘센토리’에서 일하는 김씨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이 향에 대한 느낌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어둠 속에서도 5~6개의 향료(원료)를 섞어 하나의 향을 완성해 갔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한 방울의 향료가 더해질 때마다 그 변화를 느낄 만큼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고 한다. 김아라씨는 동생이 미숙아망막증으로 시력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에게 안마 외에 다른 길이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주고 싶어 조향 수업을 계획했다”고 했다. 김씨는 시각장애인이 비시각장애인에 견줘 향을 더 잘 맡을 것이라는 ‘선입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제가 할 수 있을까요’라고 자주 묻는 학생들에게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을 계속해서 두드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누나가 그린티 향수를 썼는데 좋았다. 개인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좋아한다”는 김두섭씨는 풀밭에 있는 느낌이 나는 싱그러운 향을 좋아한다.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해설을 듣고 신비로운 푸른빛을 상상하며 만든 향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김연희씨는 “달콤하면서 맑은 느낌의 페퍼민트 향”을 즐겨 맡는다. 그는 ‘겨울’을 생각하며 만든 “깨끗하고 하얀 느낌이 나는” 향을 좋아한다고 했다. ‘맛있는 향’이 좋다는 박상영씨는 레몬 향을, 감수성이 풍부한 박주영양은 바닐라 향을 첫손에 꼽았다. 향료회사나 화장품회사에 다니는 조향사는 국내에 100여명이 있지만 이들 중 시각장애인은 한명도 없다고 한다. 조향 수업에 향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임원철 조향사(한불화장품)는 “시각장애인이라도 독창적인 감각이 있다면 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시각장애인 조향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스스로 조향사로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때가 되면 시각장애인들도 조향사로 활동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김아라씨가 학생들을 대신해 말했다. 화장품회사 록시땅에서 후원한 이 전시회는 새달 10일까지 열린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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