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10 09:09
수정 : 2019.08.10 14:37
[토요판] 금태섭의 국회의원이 사는 법
16. 정치인과 민원
주민이자 당원인 분에게 온 문자
“공기업 근무 아들 승진 도와달라”
당연히 들어줄 수 없는 얘기지만
“고민해보겠다” 말하고 끊어
최선 다해 해결해야 하는 민원
진행 경과만 파악해서 알려줄 민원
절대 관여해서는 안 되는 민원
구분 정확하게 하는 것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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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랜드 채용비리 사건이나 케이티(KT) 부정채용 사건 등이 보도되면서 국회의원들이 민원 해결에 나서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의원의 임무 중 하나다. 2017년 9월20일 강원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춘천지검 청사 앞에서 강원랜드 채용비리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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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강서갑 ○○○ 당원입니다. 의원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문자 드립니다. 시간 되실 때 전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 달 전 모르는 분으로부터 받은 문자다. 지역구 유권자, 특히 우리 당 당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긴장이 된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 때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 언제든 전화나 문자를 하면 답을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핸드폰 번호도 공개했었다. 지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문자를 보내신 분의 용건은 ‘인사 청탁’이었다. 목소리로 판단해보면 연세가 꽤 있으신 분이었는데 공공기관에 근무한다는 아들의 승진을 도와달라는 말씀을 간곡하게 하셨다. 남들이 기피하는 부서에서 오래 고생했으니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도록 그 공공기관 대표에게 전화를 한통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들어드릴 수 없는 얘기였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모라면 다 마찬가지고 오죽 부탁할 곳이 없으면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국회의원에게 연락을 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되는 일에 나설 수는 없는 법. 요즘 세상에 국회의원이 ‘전화 한통’ 한다고 해서 공공기관 책임자가 인사 청탁을 들어줄 가능성은 없다. 나중에 직권 남용이나 뇌물죄로 수사를 받을 위험성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해도 승진이나 채용 등 인사 문제에 개입할 수는 없다. 한정된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데 내가 부탁한 사람이 혜택을 받으면 반드시 불이익을 입는 피해자가 나오게 된다. 내 지역구 유권자 부탁을 들어주자고 억울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답변을 하느냐였다. 교과서대로라면 어렵지 않다. 아무리 자식 일이라고 해도 공직자에게 인사 청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야단을 치고 거절하면 된다. 검사 시절에 사건 청탁 전화를 받았다면 그런 식으로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를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 어렵다. 얼마 전 국회의원을 지내고 청와대에서도 근무했던 정치인 한 분이 민원과 관련해서 겪은 마음고생을 페이스북에 토로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눈만 뜨면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몰려드는 청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정성껏 듣고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과가 요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반드시 인간적 배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그분의 소회였다. ‘인간적 배신’까지 걱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주지 못할 민원이라고 해서 야단까지 칠 수는 없었다. 나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고민해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민원의 날’ 여는 이유
국민 전체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지역구 유권자들을 대변하기도 해야 하는 국회의원들은 주민들에게 다양한 내용의 부탁을 받는다. 법을 고쳐달라거나 지역의 숙원사업을 위해 예산을 확보해달라는 등의 공적인 민원도 있지만 취직이나 자기 사업에 도움을 달라는 사적인 요청도 많다. 이런 부탁을 받는 것 자체는 불법도 아니고 부당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사적인 민원이라고 해도 대개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재판이나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하는 것은 불법에 가깝지만,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으니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도 선출직 공직자가 공익적인 목적으로 민원을 전달하는 일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부탁해오는 민원 중에는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야 하는 종류도 있지만, 그냥 진행 경과만 파악해서 알려줘야 하는 성격의 것들 또는 절대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구분을 정확하게 해서 언제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또는 어떤 때 민원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은 정치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거나 해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포털 사이트에 ‘민원의 날’이라고 치면 국회의원들이 지역 사무실에서 민원인들을 만나는 장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주 하는 분들은 한 달에 두세 번 날짜를 정해서 민원의 날 행사를 한다. 누구든 고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지역 국회의원을 만나서 부탁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수십회씩 실적을 쌓은 의원들도 많다. 지역 활동을 성실하게 하기로 유명한 한 야당 의원의 경우 1년에 8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원의 날 행사에 찾아온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참석한 민원인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이 다 해결될 리는 없지만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여주는 정치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국회의원들의 입장에서도 지역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의 경우에는 민원의 날 행사를 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 지역구에 있는 학교의 학부모 모임이나 아파트 입주자 회의 등 주민들이 모이는 곳에 찾아가서 정부나 자치단체에 부탁할 일이 있는지 묻는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분들도 시간이 좀 지나면 평소에 느꼈던 불편한 점들을 활발하게 얘기한다. 이런 모임에는 대개 10명에서 2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함께 참석하기 때문에 사적인 부탁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초등학생들이 다니는 통학로에 차도와 인도가 구별이 안 되어서 위험하니 고쳐달라거나 지하철 막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이미 마을버스가 끊겨서 어두운 골목길을 오래 걸어가야 하니 마을버스 운행시간을 연장해달라는 등의 부탁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민원은 당연히 정치인이 나서야 하는 일이다.
비행기 소음에서 갭투자 사기까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서 해결해야 하는 민원도 있다. 우리 지역은 김포공항에 가깝기 때문에 비행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나는 소음이 불평의 대상이 된다.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여름이 되면 공항 소음 좀 어떻게 해달라는 얘기를 더 자주 듣는다. 특히 우리 지역은 현행법상 공항 소음으로 인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준에 약간 못 미치기 때문에 보상을 받는 이웃 지역 주민들에 비해 박탈감이 심하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사실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공항을 이전하거나 이착륙하는 항공기 수를 줄이는 일은 당연히 할 수 없다. 주민들도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일반 시민에 비해서 행정관청이나 관계기관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필요한 때에는 설명을 하라고 요청할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비행기 소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잘못된 소문이 돌고 불신이 생기게 된다. 민원을 제기하는 목소리를 자세히 들으면 그런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첫째는 김포공항의 이착륙 경로가 변경되어서 과거에 비해 비행기들이 주택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 둘째는 실제로 발생하는 소음의 크기가 보상 기준을 초과하는데 관계기관이 그 사실을 숨기거나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공항공사 쪽과 환경공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를 초청해서 토론회를 열었다.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륙 직후 또는 착륙 직전 활주로에 드나드는 경로를 마음대로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실제로 그런 변경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했다. 소음 크기와 관련해서는 내가 직접 측정기가 설치된 곳을 찾아가서 비행기가 상공을 통과할 때 계기판에 나타나는 숫자를 확인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당장 불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상황을 모르고 있을 때에 비해서는 낫다. 주민들도 수고했다고 하면서 노력은 인정해주는 모습이었다.
좀 더 절박한 민원들도 있다. 부동산 갭투자가 성행하면서 우리 지역에 수백채의 빌라를 매입해서 전세를 줬다가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고 자취를 감춘 임대사업자가 생겨났다. 잠재적인 피해자가 1천여가구에 이른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왔다. 상당수의 세입자들이 신혼부부 또는 생애 첫 전셋집을 얻은 젊은 분들인데 졸지에 전 재산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당사자들 사이에 민·형사소송을 해야 하는 법적 분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수백명의 임차인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대표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피해자들 모임에 접촉해서 간담회를 열어 현재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 일시에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관계기관들과 함께 가능한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법률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할 계획이다.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 다른 지역구 국회의원들과 함께 의논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민원 듣는 것은 의원의 의무
강원랜드 사건이나 케이티(KT) 부정채용 사건 등이 보도되면서 국회의원들이 민원 해결에 나서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일각에서는 주민들의 부탁에 시달리는 지역구 국회의원에 비해 의정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비례대표 의원이 더 낫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선출직 공무원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물론 그중에는 관여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민원도 있다. 그러나 사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여는 민원의 날 행사나 간담회를 찾아오는 민원인들은 고민을 호소할 다른 통로가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귀 기울여 얘기를 들어주고 관련된 절차를 설명해주고 때로는 담당자를 만나서 한번 하소연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정쟁이 심해질 때면 여야를 막론하고 민생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민생정치의 출발이다. 때로는 무리한 부탁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의정 활동은 소홀히 하고 선거운동에만 신경을 쓴다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의원들이 민원인을 만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 도움이 되지도 못했는데 애를 써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야말로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만드는 자극제가 된다.
▶ 금태섭 : 국회의원(서울 강서갑). 더불어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 대변인을 지냈다. 검사 시절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한겨레>에 연재하다가 ‘윗선’의 반대로 좌절한 경험이 있다. 천직으로 여겼던 검사도 그만둬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할 말은 하고 산다”가 인생의 모토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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