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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3 15:50 수정 : 2019.12.13 16:03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12일 오후 서울 정동1928아트센터에서 사단법인 평화디딤돌과 공동 주최로 ‘일제 강제동원 희생의 기억과 추모 그리고 귀환의 의의’라는 주제로 문화행사를 열었다. 사진 김소연 기자

대담 |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정병호 한양대 교수
70년 이상 한·일 정부 강제동원 유해 발굴·봉환 외면
도노히라 “우연히 본 조선인 위패, 이대로 둘 수 없었다”
정병호 “도노히라 스님에 감동, 함께 하자고 약속했다”
“일본 정부·기업 압박 위해 국제연대 확산시켜야” 지적도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12일 오후 서울 정동1928아트센터에서 사단법인 평화디딤돌과 공동 주최로 ‘일제 강제동원 희생의 기억과 추모 그리고 귀환의 의의’라는 주제로 문화행사를 열었다. 사진 김소연 기자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봉환하는 사업은 한·일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양국 종교·시민사회의 노력으로 40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중심엔 도노히라 요시히코(73) 일본 홋카이도 사찰 ‘이치조’의 주지승과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평화디딤돌 이사장)가 있다. 이들은 2015년 조선인 유골 115위를 들고 ‘홋카이도→도쿄→교토→히로시마→시모노세키’를 거쳐 한국 부산에 도착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홋카이도까지 끌려갔던 뱃길을 거꾸로 되돌아 70년 만에 고국으로 ‘귀향’한 것이었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12일 오후 서울 정동1928아트센터에서 사단법인 평화디딤돌과 공동 주최로 ‘일제 강제동원 희생의 기억과 추모 그리고 귀환의 의의’라는 주제로 문화행사를 열었다. 이날 도노히라 스님과 정병호 교수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해 발굴과 봉환 사업에 담긴 의미 등에 대해 대담을 가졌다. 동아시아학 권위자이자 국제적인 시민운동가인 마크 셀던 미국 코넬대 교수도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국제적인 연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 또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2015년 위안부 합의 등을 통해 역사 문제를 은폐시킨 공범자라는 비판도 나왔다.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발굴 왜 시작했나?

도노히라 내가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문제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40년 전이다. 1976년 홋가이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슈마리나이 댐 공사 현장 근처에 있는 절에서 조선인 위패를 보게 됐다. 오늘도 갖고 왔다. 황병만, 쇼와 18년(1943년) 9월10일이라고 적혀 있다. 황씨가 댐 공사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위패였다. 절에서 또 다른 위패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디서 왔고,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산 속에 매장된 상태였다.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유골 발굴 등의 작업을 시작했다.

정병호 1989년 가을이었다. 일본 어린이집 조사 등 미국대학 학위논문을 위해 홋카이도에 왔다. 시골 작은 절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스님을 만났다. 그 분이 도노히라 스님이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도중 산속 댐 공사 현장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10년째 수풀에 묻힌 유골을 찾아 불교식으로 화장해 모시고 있다고 했다. 희생된 분들의 유족을 찾아서 유골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스님과 조선인이 묻혀 있다는 숲을 갔는데 묘지라고 볼 수 없었다. 그냥 방치해 둔 상태였다. 10년 동안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로했다던 스님을 보고 감동했다. 다만 학자로써는 스님의 유골 발굴 방식에 안타까움도 있었다. 정성껏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유골이 말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살인지, 어떻게 다쳤는지 과학적으로 발굴을 하면 알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면 학생들과 다시 오겠다고 스님과 약속을 했다. 10년 만인 1997년 7월 전문가, 대학생, 자원 활동가들과 함께 스님을 찾아갔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여름과 겨울 한일 워크숍을 통해 유골 발굴, 유족 조사, 역사현장 탐방 등을 하고 있다.

도노히라 1982년 한국을 처음으로 가본 적이 있다. 경상도, 충청도를 돌면서 직접 유족을 찾아다녔다. 유골을 돌려주면 유족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에 유족들이 저를 보고 굉장히 화를 냈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를 끌고 가서 아무런 보상도 안 해주고, 사과도 하지 않고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냐는 내용이었다. 당시 충격이 컸다. 우리는 이들의 한과 분노를 전혀 몰랐구나 생각했다. 아베 일본 총리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한국인들의 현실은 아무 것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2015년 부산 동구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훗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이 70년 만에 귀환해 입국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부산/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반인도적 범죄, 권력 당국자 합의로 덮어버릴 수 없다

마크 셀던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는 과거사 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 싶다. 유골 발굴, 봉환 사업은 한일 민중이 연대하고 평화를 모색하는 풀뿌리 운동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대로다. 아래로부터 변화가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다. 또 하나는 국제성이다. 위안부, 강제동원은 한일 문제만은 아니다. 강제노동만 봐도 중국, 대만 등 국제적인 연대가 가능하다.

도노히라 강제동원 피해자는 일본 정부와 기업에 책임이 있다. 이들이 나서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일본 시민들이 아베 정권에 대해 이 문제 해결하도록 요구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시민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깊은 사죄의 마음으로 유골을 돌려 주면서 깊은 사죄와 화해,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 국익을 생각하는 정부, 이익을 생각하는 기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부럽다. 우리는 100만명이 모여 데모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디까지 가능하게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겠다.

정병호 유골 발굴 사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만남이다. 한일 젊은이들이 많이 참여했다. 한일 대학생들이 교류를 통해 잊고 살았던 과거사 문제를 돌아보고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연 인원 1500여명씩 20년이다. 그 학생들이 성장해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셀던 교수가 지적했듯 국제적인 문제로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아시아 사람들이 문제를 지적하면 비난으로 듣는다. 서구와 국제사회가 목소리를 내면 비판으로 생각해 무겁게 받아들인다. 아시아에 대한 강제노동, 반인도적 행위는 전후 재판 등 제대로 따져보지 못했고, 국제사회도 외면했다. 우리도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 등을 한일 문제로 좁히지 말고, 인류 보편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다른 아시아 피해국가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마크 셀던 한일 시민사회 연대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기업의 책임도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 사과하고, 배·보상 해야 한다. 이런 원칙을 지켜야 해법에 접근할 수 있다.

정병호 일본 정부 책임만 따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도 자유로울 수 없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등 온 국민이 반대하는데도 밀어붙였다. 강제노동 희생자들도 살아있던 전후 20년이던 그때, 제대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부상당한 사람은 치료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협정으로 모든 것이 덮어졌다. 한국 정부도 강제동원 문제를 은폐시킨 공범자라고 생각한다. 반성하지 않으니까 2015년 위안부 합의까지 간 것이다. 강제동원의 가해자는 일본인데도 피해자인 한국이 수세로 몰리는 이런 상황까지 만들고 있다. 하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의 원인을 만들고 70년 이상 계속 되고 있는 역사적 책임은 양국 정부가 져야 한다. 국제적 연대를 통해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권력 당국자 합의로 덮어버릴 수 없다는 것 알려야 한다. 아시아 시민들이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시민법정 만들기를 제안한다.

도노히라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은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에게 있다. 역사적 책임에 대해 더 깊이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죄송하게도 일본 국민 안에서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더 노력하겠다. 유엔 등 국제적 문제로 확산시키자는데 공감한다.

“홋카이도 강제동원 희생자 기리는 전시관을 살립시다” 

“한국의 시민사회도 참여를 부탁한다. 강제노동 관련한 유일한 자료관인 ‘사사노보효 전시관’을 지켜나가기로 결심했다. 재건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 대담을 이어가던 도노히라 요시히코(73) 스님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말이다. 전시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스님이 말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은 홋카이도 슈마리나이댐 옆에 있는 건물이다. ‘대나무 숲 묘지’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처음에는 ‘고켄지’라는 절이었다.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숨지면 장례를 치르기 전 이곳에 주검을 안치했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바뀌었고, 슈마리나이 강제동원 희생자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위패가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계속되던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 슈마리나이에선 철도와 수력발전 댐을 만드는 토목공사가 있었다. 조선, 중국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추위와 영양 부족 등으로 숨져갔다. 고켄지는 이들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던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전시관은 1997년 해마다 한국과 일본 등 청년들이 모여 유골 발굴을 하고, 토론도 진행하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동 워크숍’을 여는 장소이기도 하다. 홋카이도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발굴·봉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이런 전시관이 올해 초 폭설로 심하게 망가졌다.

“슈마리나이는 일본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눈이 너무 무거워 전시관이 약간 무너졌다.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도노히라 스님은 전시관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도노히라 스님은 “이 절을 재건하면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관계를 끊지 않고 더욱 키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8월엔 일본 <엔에치케이>에서 전시관의 안타까운 사연이 보도되기도 했다.

문의 : 02) 2677-8270(평화디딤돌)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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