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3.31 12:00 수정 : 2019.03.31 20:22

1988년 9월17일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식 장면. 국가기록원 누리집 갈무리

외교부 31일 공개한 1988년 외교문서
“중, 북과 교섭했지만, 북 단호히 거부”
덩사오핑은 6월 김일성에 ‘개인 메시지’
“북도 평화올림픽 개최 움직임에 동참”
남북은 2만5000명 자유왕래 검토해
사마란치, 끈질기게 남북회담 중재했으나
비현실성 인지…소련 참가 유도 목적 확인

1988년 9월17일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식 장면. 국가기록원 누리집 갈무리
1988년 서울올림픽의 남북 분산 개최는 결국 무산됐지만, 논의 과정에서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북이 추진하고 있는 전향적인 조처들이 논의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경기 종목을 북한에서 개최하기 위해 막혀있던 하늘길과 뱃길, 땅길을 잇고 2만5000명의 자유왕래를 보장하는 방안이 협의됐으며, 중국은 올림픽 선수단을 열차편으로 판문점을 거쳐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외교부는 31일 이런 내용을 포함한 30년 이상 경과 외교문서 1602권(약 25만쪽)을 원문해제와 함께 공개했다.

1988년 8월 파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대리가 타전한 외교문서를 보면 중국 대사관 차석인 샤오지옹추 참사관은 한국 쪽에 주요한 제보를 해왔다. 내용은 중국이 철도편으로 북한과 판문점을 경유해 자국 올림픽 선수단을 서울에 보낼 계획이었다는 것이었다. 샤오 참사관은 “(중국이 이 문제로) 북한 쪽과 교섭”했지만 “북쪽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전했다. 북-중 간 구체적 논의 일시나 협의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중국이 서울올림픽 참여를 공식 통보한 1988년 1월 중순 이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통보 이틀 전 북한은 올림픽 불참 선언을 한 터여서 중국 선수단의 경유 요청을 거부했을 개연성이 크다. 결국 중국은 서울올림픽에 300명에 가까운 선수단을 항공편을 통해 참가시켰다.

이 외교문서에 보면 당시 중국 쪽은 “북한의 올림픽 불참 결정은 어느 면에서 보나 잘못된 것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처사로 보며, 한국 쪽 제의대로 몇개 종목을 할애 받으면 북한이 충분히 체면유지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아울러 “절대 권력을 가진 김일성에게 올바른 정책 건의를 하지 못하는 북한 체제의 경직성 때문에 올림픽에 관해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보며, 남북한 간 교류와 협조의 획기적 호기를 놓치게 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덩샤오핑 당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그해 6월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김일성 주석에게 개인 메시지(personal message)를 전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전달된 메시지가 문서였는지 구두 형태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북한도 평화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한 세계적 노력에 동조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는 7월17일 미 국무부 관계관이 주미 한국대사관 쪽에 전한 정보로, 중국 쪽은 7월 초까지 북쪽으로부터 이 메시지에 대한 회신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1981년 9월 제 24회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된 것에 반대해오다가 1985년 7월부터 남북 공동개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4차례에 걸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중재 하에 진행된 로잔느 남북체육회담에서는 서울-평양간 도로 및 철도 연결, 남포항-인천항을 여객 항로로 개설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1986년 6월 로잔느에서 진행된 3차 회담에서는 남북 양쪽이 자유왕래 방안을 수락하면서 북쪽이 기자 9000명, 선수 임원 12000명, 국제경기연맹 등 4000명 등 ‘올림픽 가족’ 2만5000명에게 국경을 개방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국경 개방 기간은 올림픽 대회 2주 전부터 대회 종료 때까지로 정하기도 했다.

다만 이런 논의를 중재했던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로잔느 회담이 진행되는 내내 북한이 국경을 개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어떻게 북한이 세계 각국의 선수, 임원, 언론인들에게 국경을 개방할 수 있단 말이냐”며 서울올림픽의 분산개최안이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그가 끈질기게 로잔느 남북체육회담을 고집했던 데에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이 냉전의 시류를 타고 ‘반쪽’짜리로 전락했던 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울올림픽에는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지은 박민희 노지원 기자 mirae@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