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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8 09:42 수정 : 2018.07.28 15:29

[토요판] 커버 스토리 끝나지 않은 노근리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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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을 지키다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무고한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근리 비극이 대표적입니다. 당연히 미국이 책임지고 풀어야 할 문제이며, 한때 해결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말뿐 실행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자초지종을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을 만나 들어봤습니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오전 충북 영동 노근리평화공원에서 했습니다.

미군이 No-Gun-Ri라고 부른 동네에서 1950년 7월말 피난 가던 인근 주민 200여명이 그들의 총에 맞아 죽고 다쳤다. 우방국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억울한 사연은 노근리 다리에서 아들과 딸을 잃은 정은용(2014년 작고)씨의 오랜 싸움으로 1994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노근리 진실을 향한 아버지의 싸움에 아들 구도씨가 늘 함께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미국은 마침내 2001년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성명과 함께 희생자에 대한 금전 지원을 약속했다. 잘 해결되는 듯 했다. 하지만, 추모비도, 유가족에 대한 장학금 약속도 사라졌다. 그래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더 억울하다. 노근리 보상을 외면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몹시 서운하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과의 만남은 지난 5일 노근리평화공원과 공원 내 평화기념관에서 가졌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은 1991년부터, 지금은 고인이 된 부친 정은용씨를 도와 노근리의 진실을 파헤치는 싸움을 해왔다. 정 이사장이 지난 5일 충북 영동군 노근리평화공원 내 평화기념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 <뉴욕 타임스>의 선친에 관한 부음 기사(2014.8.25)를 펼쳐 보이고 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우리의 우방이자 맹방인 미국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 노근리평화공원을 만들고 노근리 희생자들의 위령탑을 세우는 데 미국 돈은 1달러도 안 들어갔다.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배상금이나 보상금은커녕 위로금도 한 푼 안 줬다. 이러고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나.” 지난 5일 장맛비가 그친 뒤 맑게 갠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낸 노근리평화공원(충북 영동군 황간면)은 겉으로는 이름만큼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뭉게구름은 주변의 낮은 산자락 위를 떠 가고, 경부선 철길 아래 쌍굴로 돼 있는 비극의 노근리 다리조차 풍경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자연의 여유로움이 노근리의 아픔을 덮을 수는 없다. 기자가 위령탑 참배를 마치고 나자,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62·이하 호칭 생략)은 피난민 대열을 형상화한 동상을 가리키면서 억눌러왔던 말을 쏟아냈다.

“피난민 대열에 끼어 엄마 뒤를 따라가는 저 아이는 신발을 잃어버려서 한 쪽은 맨발로 걷고 있다. 아이의 발바닥은 물집 등 온통 상처 투성이다. 이 아이는 며칠 뒤 노근리 다리에서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다섯살이었던 우리 형님(구필)이다. 그 아들의 발바닥 상처는 지금까지 어머니(박선용·94) 가슴 속에 멍울로 남아서 매년 이맘 때면 힘들어 하신다. 어머니가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른다. 이런 분들에 대해 미국은 나몰라라 하고 있다.”

2001년 1월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내 “깊은 유감(deeply regret)”을 표했다. 그는 성명서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memorial)와 그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commemorative scholarship fund)을 제의했다. 미국 정부는 추모비 건립 비용 119만달러와 장학기금 280만달러 등 모두 400만달러(현 시세로 약 44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하지만 이 돈은 사용되지 못하고 2006년 미국 국고로 회수됐다.

218명 사상에 40여억원 제시한 미국

- 약소한 돈이지만, 미국 대통령이 내놓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는데 왜 사용하지 않았나?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미국 대통령의 유감 성명은 그동안 미국이 세계 각국에서 자국 군대가 저지른 숱한 범죄행위에 대해 한번도 사과나 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공식 사과가 아닌 유감이다 보니까 배상이나 보상금이 아니었다. 미국으로서는 배상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노근리가 선례가 될 경우 베트남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전세계에서 쏟아져 나올 배상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미군에 의한 피해가 120건이나 신고돼 있다. 이 때문에 배상 아닌 위로금 성격의 장학금을 내놓겠다고 한 것이다. 미미한 금액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 뜻이라면 수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미국은 그게 아니었다. 추모비나 장학금 대상을 노근리 피해자에 한정하지 않고 ‘한국전쟁 동안 고통을 당하고 사망한 모든 민간인’(all Korean civilians who suffered and died during the Korean War)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조사도 안 이뤄진 다른 피해자들을 노근리에 끼워넣어서 넘어갈 수는 없지 않나.”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5일 노근리평화공원 위령탑의 피난민 조각상 앞에서 벗겨진 어린이 신발을 가리키며 1950년 노근리의 비극을 설명하고 있다. 사건 당시 다섯살이었던 정구도의 형, 구필은 실제 신발 한 쪽을 잃어버려 맨발로 피난갔으며, 어머니와 쌍굴을 탈출하던 중에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피난민 200여명 미군에 희생된
1950년 7월25~29일 노근리 사건
1999년 AP 보도로 국제 이슈화
클린턴 대통령, “유감” 성명·보상 약속
시간 흐르자 립서비스로 드러나

미, 돈 사용에 억지 조건 내건 탓
“노근리 한정 말고 미군에 의한
한국전쟁 전체 피해자가 대상” 주장
노근리 피해자, “수용 못해” 거부하자
약속한 400만달러 회수해 가버려

- 명목상으로는 전체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다지만, 실제적으로는 노근리 피해자가 수혜자가 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수용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피해자들은 다들 살림이 어렵다 보니 적은 돈이나마 안 받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내가 앞장서서 노근리대책위원장이던 아버님(정은용·2014년 작고)과 피해자들에게 미국 제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한일협정 때 정부가 일본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제기를 안 하는 것으로 합의하는 바람에 지금 위안부나 징용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안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앞으로 미군에 의한 다른 피해자들이 확인되더라도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배상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런 것을 알면서 우리 실속만 챙기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노근리 사건은 6·25 발발 한달 만인 1950년 7월25일부터 29일에 걸쳐 일어났다.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미군 제1기병사단은 당시 충북 영동과 황간 지역에 방어선을 쳤다. 방어선 인근에 있던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7월23일 미군 1명과 한국 경찰 1명이 찾아가 “이곳이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오늘 중으로 마을을 비우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약 2km 떨어진 산속 마을인 임계리로 피난을 갔다. 25일 늦은 오후에는 미군들이 다시 임계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피난갈 수 있게 해주겠다면서 주민들을 황간 쪽으로 출발시켰다. 미군은 두 마을 주민 500~600명을 하가리 근처의 하천변에서 밤을 보내게 하면서 대열을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총을 쏘았다. 이날 저녁 1~4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노근리 쌍굴의 모습. 경부선 기찻길 아래에 놓여 있는 쌍굴 안팎에 당시 미군이 쏜 총탄 자국이 곳곳에 표시돼 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튿날인 26일 아침에는 미군도 사라졌고,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가던 방향인 황간 쪽으로 걷고 있었다. 서송원리 쯤에 이르자, 미군들이 다시 나타나 이들을 도로 옆의 경부선 철도 위로 올라가게 했다. 당시 미군은 원활한 병력 수송을 위해 자주 피난민의 도로 통행을 금했다. 철로 위에서 피난민들이 미군한테 짐 검사를 받고 났을 때 남쪽에서 날아온 미군 전투기가 이들에게 무차별로 총을 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철로 아래 수로 등에 몸을 숨겼다가 근처의 노근리 쌍굴로 피신했다. 이때부터 29일까지 미군은 쌍굴 바깥 양쪽의 진지에서 다리 아래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야간에 젊은 사람 일부는 쌍굴을 탈출했지만, 노약자들은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그들의 총격 대상이 됐다. 나중에 발굴된 미군의 문서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방어선을 아무도 넘어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50명이 숨지고, 13명이 행방불명됐으며, 55명이 심한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됐다.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94년 정은용이 실명소설인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하면서부터였다. 소설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서울에서 대학(중앙대 법학과)을 다니면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던 정은용은 6·25가 발발하자, 부모 및 아내, 두 아이가 살고 있는 고향(영동읍 주곡리) 마을로 내려왔다. 미군의 소개령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임계리로 피난했다가 이튿날인 7월24일 “이 곳을 빨리 떠나라”는 부모, 아내의 요구와 애원에 혼자 산을 넘어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노근리평화공원에 있는 모자상의 조각품. 쌍굴에서 미군의 총에 맞아 숨진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돌도 안 된 아이를 통해 작가는 노근리의 비극을 형상화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들·딸 잃은 정은용 “내 생애 모든 행복 끝나”

비극은 다음날부터 일어났다. 그의 가족은 26일 철길에서 있었던 미군 비행기의 공격에서는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노근리 쌍굴다리의 참극은 피해가지 못했다. 쌍굴로 피난한 그날 한밤 중에 두살난 딸 구희가 몹시 울기 시작했다. 아이를 달래기 위해 정은용의 어머니가 손녀를 업고 터널 밖으로 잠시 바람쐬러 나갔다가 미군이 쏜 총에 구희가 맞아 숨졌다. 딸을 잃은 아내 박선용은 다섯살짜리 아들(구필)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27일 새벽 구필을 데리고 노근리 다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산길을 헤매던 박선용은 미군 초병이 쏜 총에 옆구리를 맞고 중상을 입었고, 그 총알은 등에 업고 있던 아들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피난지인 부산에서 극적으로 아내를 만난 정은용은 “아이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크게 흐느껴 울기만 한 채 답을 못하는 아내를 보고는 “이제 내 생애의 모든 행복은 끝이 났다”(<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고 생각했다.

1950년 12월 그는 해방 직후 일했던 경찰(충청남도 경찰국)에 복귀했다. 이후 반공연맹(자유총연맹의 전신)에서 일하다가 관권선거에 동원되는 것이 싫어서 관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노근리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번도 잊지 않았다. 4·19 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1960년 어느날 대전에 살던 정은용은 미군이 6·25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아서 배상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봤다. 그는 고향의 피해자 몇명과 함께 서울의 미군 소청사무소에 노근리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미군은 그해 11월 “접수 기한이 지났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그해 말 워싱턴의 미국 정부 앞으로 손해배상 청구서를 다시 보냈지만, 이번에는 미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노근리평화공원 위령탑.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노근리 사건 자체를 언급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지속됐다. 정은용은 소설 형식을 빌려 사건을 알리려 했다. 1977년 문학 월간지인 <한국문학> 소설 공모에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중편소설을 내서 입선했으나, 입선에 그친 탓에 글이 실리지는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인 1985년에는 <문화방송>의 6·25 특집드라마에 희곡으로 바꿔서 내기도 했다. 역시 민감한 내용이어서인지 당선작으로 뽑히진 않았다. 정은용은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도서관에서 자료를 모으는 등 노근리 진실을 밝히기 위한 준비작업을 계속 했다.

1991년 봄 어느날 저녁 직장에서 퇴근한 정구도(정은용이 1955년 얻은 아들)는 책상 위의 원고 무더기를 발견했다. “내가 알리지 않으면 노근리 사건은 영영 역사 속에 묻혀 버릴 것 같다. 죽기 전에 글을 써야겠다”면서 그해 새해 초부터 정은용이 써오던 원고였다. 별 생각없이 원고지를 들고 읽기 시작한 정구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정구도가 노근리 진실을 밝히는 긴 싸움에 뛰어든 운명의 순간이었다.

노근리대책위의 정은용 위원장(맨오른쪽)과 정구도 대변인(맨왼쪽) 등 노근리 유족 대표들이 1994년 7월 5일 '진상조사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 세종로 주한 미대사관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아버지를 돕기 위해 박사학위(한남대 경영대학원) 논문 쓰는 것도 미뤘다고 하던데?

“당시 한국전력공사에 다닐 때여서 논문을 빨리 마무리짓고 교수로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원고를 읽고 우선 아버지한테 작은 효도라도 하자는 결심을 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한테 노근리 얘기를 들어왔지만, 그때까지는 머리로만 알았다. 형님과 누님이 숨질 당시의 나이와 비슷한 아이들을 두고 있어서였는지 그 때 원고를 읽으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픔이 가슴으로 와 닿았다. 그때부터는 내 삶의 무게 중심이 바뀌었다.”

정은용은 책 머리말에서 “장남 구도는 참고문헌의 수집에 많은 노고를 쏟았을 뿐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써 주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구도는 1999년에야 박사 논문을 마쳤다. 정구도는 그 뒤 헤드헌트사를 통해 미국계 회사의 스카웃 제의와 다른 회사의 사장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노근리특별법안 제정 등을 앞두고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순전히 내 돈 쓰고 다닐 때였는데 집사람이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 1994년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책이 나온 뒤에도 노근리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책 출간부터 쉽지 않았다.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 시절이었지만, 서울의 유력 출판사들은 원고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다리미디어의 강희제 사장이 ‘손해가 나더라도 내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빛을 보게 됐다. 책이 나오고 난 며칠 뒤 <연합뉴스>에서 책 내용을 바탕으로 노근리 사건을 첫 보도했고, 곧 이어 <한겨레>는 가장 먼저 생존 피해자의 증언을 듣고 기사로 썼다. 이때부터 노근리는 살아있는 ‘사건’이 됐다.”

미군이 ‘노획한’ 북한 신문의 노근리 증언

정구도는 책 출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노근리대책위 구성은 그 첫걸음이었다. 미국을 상대로 한 싸움이 가능하겠느냐며 지레 포기하는 피해자들을 설득해서 1994년 6월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 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겨우 5명으로 출범한 대책위에서 아버지는 위원장, 아들은 기획위원 및 대변인을 맡았다. 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해 생존자 기자회견을 여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우리 정부나 미국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94년 7월 미국의 사과 및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전달하려고 대책위 5명 전원이 서울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사관 쪽은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취재기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그제서야 겨우 진정서만 접수한 채 이들을 쫓아내다시피 했다. 미국을 움직이려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마이클 애커먼(미 육군 중장) 등 미국 조사단이 1999년 10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에서 양민 학살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영동/이정우 기자

- 소설책이 나온 뒤에 중요 문서를 많이 발굴했다.

“많은 자료를 참조해서 책을 썼지만, 그럼에도 미국은 피해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치부했다. 그런 나라에 대응할 방법은 학문적인 자료밖에 없다고 봤다. 증거가 없으면 가망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회도서관 등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문서 찾기에 나섰지만, 처음에는 성과가 거의 없었다. 국군전사나 북한군전사를 뒤져도 노근리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 낙담하고 있던 어느 날 국회도서관 열람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 서가의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6·25 당시 노획한 북한자료 마이크로필름 목록집’이었다. 마이크로필름을 보관하고 있던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로 다음날 달려갔다. 눈이 아프도록 마이크로필름을 들여다보다가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으로 평화주민 4백명을 학살’이라는 제목의 <조선인민보> 기사를 발견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미국과 싸울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었다.”

노근리의 평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950년 8월 19일자 <조선인민보> 신문.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으로 평화주민 4백명을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노근리 사건을 보도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북한 신문인 <조선인민보>의 이 기사는 1950년 8월19일자였지만, 미군이 철수하고 북한군이 황간에 들어온 7월29일 저녁 무렵 현지의 모습을 취재해 실었다. 이 신문은 나중에 평양에 진주한 미군이 수집한 이른바 ‘노획된 북한 문서’의 일부이다. 미국 메릴랜드주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것을 국토통일원(통일부의 전신)이 1980년대에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왔다.

- 새 자료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별 반응을 안 보였지 않나.

“그렇다. 이 자료를 첨부해서 다시 미국 정부에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클린턴 대통령과 상·하원 의장 앞으로 보냈다. 하지만, 주한미군 배상사무소에서 미국의 책임을 부인하는 답신만 보내왔을 뿐 미국 정부는 아예 답변도 안 했다.”

주한미군 배상사무소는 1997년 8월 청주지검 청주지구 배상심의회에 보내온 회신에서 “사건 당시 노근리에 미 제1기갑사단 병력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없다”고 버젓이 거짓말했다. 당시 노근리 피해자 44명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심사하고 있었던 청주지구 배상심의회가 미군 배상사무소에 사실관계를 질의한 데 대한 답이었다.

정구도는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거듭된 외면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자료가 나올 때마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에이피(AP)>, <아에프페(AFP)> 등 외신들에게도 직접 접촉해 설명했다. 그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시사저널>과 <월간 말> 등이 심층보도를 했고, 1997년 가을에는 미국의 뉴스전문 방송인 <시엔엔(CNN)>의 ‘월드 리포트’에 노근리 사건이 소개됐다. <엠비시(MBC)>도 ‘시사매거진 2580’에서 깊이있게 다뤘다.

2001년 1월12일 낮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 주최 기자회견에서 생존자인 정구헌(오른쪽)씨가 당시 자신과 어머니, 누이가 당한 상황을 증언하며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추모제에 한번도 안 온 미국 대표

- 미국의 뉴스 통신사인 <에이피>가 보도에 나서게 된 계기는 뭔가?

“미국 쪽은 모르쇠로 일관하지, 한국 정부도 시효 만료를 내세워 배상 신청을 기각하지 해서 이제 싸움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1998년 4월초쯤이었다. <에이피> 서울지국의 최상훈 기자가 연락을 해왔다. 국내 언론의 노근리 보도를 보고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 최 기자에게 모든 자료와 기록을 주고는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작성한 900 단어 분량의 노근리 기사가 일차적으로 1998년 4월 말에 나왔다. 그 기사를 본 <에이피>는 노근리에 대한 탐사취재를 결정했고, 최 기자와 함께 본사의 조사 전문기자인 랜디 허샤프트, 특별취재팀의 마사 멘도자, 국제부 대기자 찰스 핸리 등 4명으로 노근리 특별팀을 꾸려서 취재를 시작했다.”

아무도 말 못했던 노근리 비극
44년만인 1994년 처음 알려져
쌍굴에서 아들·딸 잃은 정은용씨
“노근리 억울함 알려야 한다” 생각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책 내

부친 도와 노근리 싸움 이끈 정구도씨
“미 요구 수락은 역사에 죄짓는 일
다른 피해자들 보상권 박탈하는 꼴”

<에이피> 보도는 1999년 9월29일에 이뤄졌다. <에이피> 취재팀이 쓴 책(<노근리 다리>)에 따르면, 기사 작성은 1998년 7월말에 끝났지만 “회사 상층부는 노근리 취재 결과에 대해 회의를 품거나 소심한 태도를 내비쳤다. 좀처럼 기사를 타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도가 지연되자 노근리 취재 기자들은 오히려 취재범위를 한국전쟁 중 일어난 다른 피난민 사건으로 확대”했고, “1999년 중반에 이르자 <에이피>도 이 기사의 비중과 보도 의무를 더는 회피할 수 없었다.” 미 국방부와 참전군인 등의 반발을 우려해서 보도를 미뤘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피>의 노근리 보도는 피해자의 증언, 미군이 작성한 당시의 각종 문서, 참전 미군의 증언이 꽉 맞춰진 완벽에 가까운 보도였다. <에이피>의 기사를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시엔엔> <엔비시(NBC)> 등 미국의 신문과 방송이 일제히 주요 뉴스로 취급했다. 그동안 여러차례 노근리 사건을 무시해왔던 미 국방부는 그제서야 장관(윌리엄 코언)이 나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개의치 말고”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말만 번지르르했다. 한미 공동조사를 하자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단독 조사를 고집했다. 주요 문서에 대한 한국의 접근을 차단하고, 조사 결과를 통제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2001년 1월에 나온 미국의 조사 결과는 노근리대책위에서 우려하던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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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사상이 이뤄졌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는 “전쟁 고유의 불행한 비극이며, 고의적인 살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민간인에 대한 발표 명령이 없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언론이 찾아낸 자료에는 ‘미군이 고의로 민간인을 공격했으며, 이에 대한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내용이 여럿 있었다. 미국 조사단이 의도적으로 중요 물증을 외면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제7기병연대의 1950년 7월분 통신일지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통째로 사라진 사실도 밝혀졌다. 이 통신일지에는 부대의 명령과 지침, 연락, 보고사항이 분 단위로 기록돼 있기에 당시 노근리 상황과 피난민을 공격하라는 명령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문건이다.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내용이 미국 진상조사에서 빠짐에 따라 미국은 이후 추모비 문구와 장학사업 대상에서 ‘노근리를 문구에서 빼야 한다’는 억지 조건을 내세웠다. 결국 미국 대통령의 립서비스 몇마디만 남고 말았다.

- 많은 사람들은 노근리 문제는 미국이 사과한 줄 안다. 그리고 후속 작업으로 돈도 내놓아서 미국과의 문제는 다 해결된 줄 안다.

“전혀 아니다. 노근리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것이나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치료비를 지원하는 등의 일이 모두 우리 국민 세금으로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심지어 매년 열리는 추모제에도 여태까지 한 번 온 적이 없다. 올해도 주한 미 대사와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참석해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답변조차 못 받았다. 미국이 진정으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한미 선린관계를 고려한다면 최소한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대표들이라도 여기 위령탑에 와서 헌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내후년이면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지 70주년이다. 70주년이 되기 전에 미국이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법적인 책임과 별개로 우선 자기들이 하려고 했던 인도적 차원의 사업이라도 다시 해야 한다.”

“미군 멱살이라도 잡았으면 덜 억울할텐데”

-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도 진행 중인데 어떻게 되고 있나.

“2015년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과 2심 모두 시효가 지났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패소했다. 현재는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정한 과거사 관련 시효(진실화해위원회 활동 종료일인 2010년 6월30일에서 3년 이내 소송 청구)를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말이 안 된다. 더구나 노근리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와 관련도 없다.”

- 노근리 가해자는 미국이지 않나. 우리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한 것은 왜인가?

“직접적인 가해자는 미국이지만, 우리 정부도 미군의 노근리 학살에 책임이 있다. 당시 한미 당국은 피난민 통제와 소개 조처를 한국 정부가 하도록 합의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민간인 대피 안내를 제대로 안 했다. 노근리 사건 이틀 전에 영동군 경찰들은 주민들을 방치한 채 자기들만 빠져 나갔다. 우리 정부가 피난민 소개를 제대로만 했더라면 노근리에서의 참극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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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국의 엉터리 진상조사 결과를 당시 김대중 정부가 사실상 추인한 잘못도 있다. 그런 측면을 고려할 때 우리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해야 한다. 미국의 책임을 면탈해주는 게 아니다.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면 되지 않나. 당당한 정부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노근리 피해자들은 역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과거사 피해자들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을 받으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서 배상이나 보상을 받고 있다. 노근리는 2004년 특별법을 만들 때 배상과 보상 조항이 빠지면서 그런 길조차 막혔다. 참으로 답답하다. 또, 우리나라 국무총리나 주무(행안부)장관도 합동추모제에 참석한 적이 없다. 미국만 욕할 수도 없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정구도의 안내로 쌍굴 다리 현장을 둘러봤다. 마침 노근리평화공원에 나와 잡초뽑기 등의 일을 하고 있던 피해자 양해숙(81)도 동행했다. 당시 열세살의 양해숙은 철길에서 미군 비행기의 공격을 받았을 때 폭격의 충격으로 왼쪽 눈알이 빠졌다.

“그 사건 이후 20년 동안은 이 근처에는 오지도 못했어. 어쩌다 지나가게 돼도 너무 무서워서 귀 막고 다녔지. 미국이 배상을 안해줄 줄 알았더라면 미국에 갔을 때(1999년 11월 다른 피해자 5명과 함께 미국에서 노근리 참전군인을 만나 ‘용서와 화해의 만남’을 가짐) 미국 사람들 멱살이라도 잡을 걸 그랬어. 다 잘 될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높은 분들이 신신당부를 해서 가만히 있었더랬지. 난리라도 쳤으면 속이라도 풀렸을 텐데 너무 억울해.”

“답답해.” “억울해.” 두 사람의 외침이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영동/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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