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 스토리 끝나지 않은 노근리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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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을 지키다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무고한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근리 비극이 대표적입니다. 당연히 미국이 책임지고 풀어야 할 문제이며, 한때 해결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말뿐 실행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자초지종을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을 만나 들어봤습니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오전 충북 영동 노근리평화공원에서 했습니다.
미군이 No-Gun-Ri라고 부른 동네에서 1950년 7월말 피난 가던 인근 주민 200여명이 그들의 총에 맞아 죽고 다쳤다. 우방국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억울한 사연은 노근리 다리에서 아들과 딸을 잃은 정은용(2014년 작고)씨의 오랜 싸움으로 1994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노근리 진실을 향한 아버지의 싸움에 아들 구도씨가 늘 함께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미국은 마침내 2001년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성명과 함께 희생자에 대한 금전 지원을 약속했다. 잘 해결되는 듯 했다. 하지만, 추모비도, 유가족에 대한 장학금 약속도 사라졌다. 그래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더 억울하다. 노근리 보상을 외면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몹시 서운하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과의 만남은 지난 5일 노근리평화공원과 공원 내 평화기념관에서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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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은 1991년부터, 지금은 고인이 된 부친 정은용씨를 도와 노근리의 진실을 파헤치는 싸움을 해왔다. 정 이사장이 지난 5일 충북 영동군 노근리평화공원 내 평화기념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 <뉴욕 타임스>의 선친에 관한 부음 기사(2014.8.25)를 펼쳐 보이고 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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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5일 노근리평화공원 위령탑의 피난민 조각상 앞에서 벗겨진 어린이 신발을 가리키며 1950년 노근리의 비극을 설명하고 있다. 사건 당시 다섯살이었던 정구도의 형, 구필은 실제 신발 한 쪽을 잃어버려 맨발로 피난갔으며, 어머니와 쌍굴을 탈출하던 중에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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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25~29일 노근리 사건
1999년 AP 보도로 국제 이슈화
클린턴 대통령, “유감” 성명·보상 약속
시간 흐르자 립서비스로 드러나 미, 돈 사용에 억지 조건 내건 탓
“노근리 한정 말고 미군에 의한
한국전쟁 전체 피해자가 대상” 주장
노근리 피해자, “수용 못해” 거부하자
약속한 400만달러 회수해 가버려 - 명목상으로는 전체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다지만, 실제적으로는 노근리 피해자가 수혜자가 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수용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피해자들은 다들 살림이 어렵다 보니 적은 돈이나마 안 받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내가 앞장서서 노근리대책위원장이던 아버님(정은용·2014년 작고)과 피해자들에게 미국 제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한일협정 때 정부가 일본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제기를 안 하는 것으로 합의하는 바람에 지금 위안부나 징용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안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앞으로 미군에 의한 다른 피해자들이 확인되더라도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배상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런 것을 알면서 우리 실속만 챙기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노근리 사건은 6·25 발발 한달 만인 1950년 7월25일부터 29일에 걸쳐 일어났다.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미군 제1기병사단은 당시 충북 영동과 황간 지역에 방어선을 쳤다. 방어선 인근에 있던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7월23일 미군 1명과 한국 경찰 1명이 찾아가 “이곳이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오늘 중으로 마을을 비우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약 2km 떨어진 산속 마을인 임계리로 피난을 갔다. 25일 늦은 오후에는 미군들이 다시 임계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피난갈 수 있게 해주겠다면서 주민들을 황간 쪽으로 출발시켰다. 미군은 두 마을 주민 500~600명을 하가리 근처의 하천변에서 밤을 보내게 하면서 대열을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총을 쏘았다. 이날 저녁 1~4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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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쌍굴의 모습. 경부선 기찻길 아래에 놓여 있는 쌍굴 안팎에 당시 미군이 쏜 총탄 자국이 곳곳에 표시돼 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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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평화공원에 있는 모자상의 조각품. 쌍굴에서 미군의 총에 맞아 숨진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돌도 안 된 아이를 통해 작가는 노근리의 비극을 형상화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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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평화공원 위령탑.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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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대책위의 정은용 위원장(맨오른쪽)과 정구도 대변인(맨왼쪽) 등 노근리 유족 대표들이 1994년 7월 5일 '진상조사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 세종로 주한 미대사관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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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애커먼(미 육군 중장) 등 미국 조사단이 1999년 10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에서 양민 학살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영동/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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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의 평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950년 8월 19일자 <조선인민보> 신문.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으로 평화주민 4백명을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노근리 사건을 보도했다. 영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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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12일 낮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 주최 기자회견에서 생존자인 정구헌(오른쪽)씨가 당시 자신과 어머니, 누이가 당한 상황을 증언하며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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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만인 1994년 처음 알려져
쌍굴에서 아들·딸 잃은 정은용씨
“노근리 억울함 알려야 한다” 생각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책 내 부친 도와 노근리 싸움 이끈 정구도씨
“미 요구 수락은 역사에 죄짓는 일
다른 피해자들 보상권 박탈하는 꼴” <에이피> 보도는 1999년 9월29일에 이뤄졌다. <에이피> 취재팀이 쓴 책(<노근리 다리>)에 따르면, 기사 작성은 1998년 7월말에 끝났지만 “회사 상층부는 노근리 취재 결과에 대해 회의를 품거나 소심한 태도를 내비쳤다. 좀처럼 기사를 타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도가 지연되자 노근리 취재 기자들은 오히려 취재범위를 한국전쟁 중 일어난 다른 피난민 사건으로 확대”했고, “1999년 중반에 이르자 <에이피>도 이 기사의 비중과 보도 의무를 더는 회피할 수 없었다.” 미 국방부와 참전군인 등의 반발을 우려해서 보도를 미뤘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피>의 노근리 보도는 피해자의 증언, 미군이 작성한 당시의 각종 문서, 참전 미군의 증언이 꽉 맞춰진 완벽에 가까운 보도였다. <에이피>의 기사를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시엔엔> <엔비시(NBC)> 등 미국의 신문과 방송이 일제히 주요 뉴스로 취급했다. 그동안 여러차례 노근리 사건을 무시해왔던 미 국방부는 그제서야 장관(윌리엄 코언)이 나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개의치 말고”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말만 번지르르했다. 한미 공동조사를 하자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단독 조사를 고집했다. 주요 문서에 대한 한국의 접근을 차단하고, 조사 결과를 통제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2001년 1월에 나온 미국의 조사 결과는 노근리대책위에서 우려하던대로였다. [%%IMAGE11%%] 미국은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사상이 이뤄졌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는 “전쟁 고유의 불행한 비극이며, 고의적인 살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민간인에 대한 발표 명령이 없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언론이 찾아낸 자료에는 ‘미군이 고의로 민간인을 공격했으며, 이에 대한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내용이 여럿 있었다. 미국 조사단이 의도적으로 중요 물증을 외면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제7기병연대의 1950년 7월분 통신일지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통째로 사라진 사실도 밝혀졌다. 이 통신일지에는 부대의 명령과 지침, 연락, 보고사항이 분 단위로 기록돼 있기에 당시 노근리 상황과 피난민을 공격하라는 명령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문건이다.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내용이 미국 진상조사에서 빠짐에 따라 미국은 이후 추모비 문구와 장학사업 대상에서 ‘노근리를 문구에서 빼야 한다’는 억지 조건을 내세웠다. 결국 미국 대통령의 립서비스 몇마디만 남고 말았다. - 많은 사람들은 노근리 문제는 미국이 사과한 줄 안다. 그리고 후속 작업으로 돈도 내놓아서 미국과의 문제는 다 해결된 줄 안다. “전혀 아니다. 노근리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것이나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치료비를 지원하는 등의 일이 모두 우리 국민 세금으로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심지어 매년 열리는 추모제에도 여태까지 한 번 온 적이 없다. 올해도 주한 미 대사와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참석해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답변조차 못 받았다. 미국이 진정으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한미 선린관계를 고려한다면 최소한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대표들이라도 여기 위령탑에 와서 헌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내후년이면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지 70주년이다. 70주년이 되기 전에 미국이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법적인 책임과 별개로 우선 자기들이 하려고 했던 인도적 차원의 사업이라도 다시 해야 한다.” “미군 멱살이라도 잡았으면 덜 억울할텐데” -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도 진행 중인데 어떻게 되고 있나. “2015년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과 2심 모두 시효가 지났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패소했다. 현재는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정한 과거사 관련 시효(진실화해위원회 활동 종료일인 2010년 6월30일에서 3년 이내 소송 청구)를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말이 안 된다. 더구나 노근리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와 관련도 없다.” - 노근리 가해자는 미국이지 않나. 우리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한 것은 왜인가? “직접적인 가해자는 미국이지만, 우리 정부도 미군의 노근리 학살에 책임이 있다. 당시 한미 당국은 피난민 통제와 소개 조처를 한국 정부가 하도록 합의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민간인 대피 안내를 제대로 안 했다. 노근리 사건 이틀 전에 영동군 경찰들은 주민들을 방치한 채 자기들만 빠져 나갔다. 우리 정부가 피난민 소개를 제대로만 했더라면 노근리에서의 참극은 없었을 것이다. [%%IMAGE12%%] 또, 미국의 엉터리 진상조사 결과를 당시 김대중 정부가 사실상 추인한 잘못도 있다. 그런 측면을 고려할 때 우리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해야 한다. 미국의 책임을 면탈해주는 게 아니다.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면 되지 않나. 당당한 정부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노근리 피해자들은 역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과거사 피해자들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을 받으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서 배상이나 보상을 받고 있다. 노근리는 2004년 특별법을 만들 때 배상과 보상 조항이 빠지면서 그런 길조차 막혔다. 참으로 답답하다. 또, 우리나라 국무총리나 주무(행안부)장관도 합동추모제에 참석한 적이 없다. 미국만 욕할 수도 없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정구도의 안내로 쌍굴 다리 현장을 둘러봤다. 마침 노근리평화공원에 나와 잡초뽑기 등의 일을 하고 있던 피해자 양해숙(81)도 동행했다. 당시 열세살의 양해숙은 철길에서 미군 비행기의 공격을 받았을 때 폭격의 충격으로 왼쪽 눈알이 빠졌다. “그 사건 이후 20년 동안은 이 근처에는 오지도 못했어. 어쩌다 지나가게 돼도 너무 무서워서 귀 막고 다녔지. 미국이 배상을 안해줄 줄 알았더라면 미국에 갔을 때(1999년 11월 다른 피해자 5명과 함께 미국에서 노근리 참전군인을 만나 ‘용서와 화해의 만남’을 가짐) 미국 사람들 멱살이라도 잡을 걸 그랬어. 다 잘 될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높은 분들이 신신당부를 해서 가만히 있었더랬지. 난리라도 쳤으면 속이라도 풀렸을 텐데 너무 억울해.” “답답해.” “억울해.” 두 사람의 외침이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영동/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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