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07 14:02
수정 : 2006.03.07 14:09
한 “뒤따라 는 중국 뿌리치려”
미 “한국내 중국 영향력 줄이려”
한국과 미국은 자유무역협정(FTA) 1차 예비협의를 6일 서울에서 열어 협상 절차 등을 절충했다. 한국사회에 메가톤급 영향을 끼칠 역사적 협상이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2월3일 한-미의 양자 자유무역협정 협상 공식 개시 선언 이후 한달이 지났지만, 적잖은 전문가들은 아직도 ‘느닷없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미 두 나라는 어떤 판단을 했고, 어느쪽이 적극적이었나? 두 나라는 어떤 경로를 거쳐 협상 개시 공식 선언에 이르게 된 것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궁금증은 꼬리를 문다.
노무현 대통령의 ‘결심’=한-미 두 나라는 2004년 초부터 양자 자유무역협정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하지만 정부 고위관계자의 “미국은 애초 우리와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할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는 전언처럼, 미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협상 개시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합의에 이르게 된 분수령은 지난해 6월 한미정상회담이었던 것 같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세차례의 한-미자유무역협정 사전 점검회의가 열렸다. 롭 포트먼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세 차례의 점검회의 뒤인 지난해 6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게 “핵심 쟁점이 풀리기 전에 본 협상에 들어가는 건 시기상조”라고 밝혔다고 2월9일 공개된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한-미 경제관계:자유무역협정을 위한 협력, 마찰, 전망’)는 전하고 있다. 포트먼 대표가 거론한 ‘핵심 쟁점’이란 한국의 자동차·의약 관련 ‘무역장벽’, 미국산 쇠고기 수입금지, 스크린쿼터를 일컫는 것이다. 미국 쪽에선 이를 “한국정부가 미국과 협상할 정치적 능력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말해왔다. 지난해 9월 노무현 대통령은 이 시험을 통과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는 노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와 관련해 2월16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외경제위원회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여건을 조성해 우리가 제안해 성사된 것이고 압력은 없었다”라고 밝힌 데서도 확인된다. 한 소식통은 노 대통령이 지난해 9월11~12일 코스타리카를 방문하던 중 김 통상교섭본부장의 관련 보고와 설명을 들은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와 관련한 ‘결심’을 했다고 전했다. 이는 지난해 7월과 9월 김 통상교섭조정본부장의 미국 방문이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한-미간 사전협의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식통은 노 대통령의 귀국 직후 청와대에서 한덕수 경제부총리, 김 본부장,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협상 추진 전략’을 조율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중대 결정은 관계자들 사이에 ‘함구령’이 내려져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때만 해도 정부는 지난해 11월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한-미 정상회담을 ‘목표 시한’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아펙정상회의 때까지 미국이 요구한 핵심쟁점은 해소되지 않았고, 스크린쿼터 일수 대폭 축소 등은 올 1월에야 풀렸다. 노 대통령은 올 1월 워싱턴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에서의 타결로 시점을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9·19공동성명의 동북아 다자안보 추진을 재확인한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회담의 경주선언, 올 1월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에서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타결, 그리고 2월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 등은 하나의 큰 흐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양자 자유무역협정 추진 전략의 수정=한국 정부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미·중·일·러 한반도 주변 4강국과의 양자 자유무역협정 체결 문제를 전략적으로 검토해왔다. 참여정부 초기 때까지 판단은 ‘일본→중국’순서로 협상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고 한 전직 정부 고위관리는 전했다. 두 나라 사이에서 한국의 정치·경제적 운신의 폭을 넓히며 역내 협력을 이끌어낸다는 구상이다. 참여정부 초기 동북아시대위원회 출범이나, ‘동북아 평화 허브’ 구상 등도 이런 판단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경제·통상뿐만 아니라 외교안보적 측면까지 고려한 수순이었다. 미국과 관련해선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는 물론 1999년 이후 중단 상태인 한-미 투자협정 협상 재개 여부조차 확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과는 2003년 12월 공식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2004년 11월 6차 협상 이후 중단된 뒤로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등 과거사 문제로 정치적 타결이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올 초의 한-미 협상 선언은 정부의 자유무역협정 ‘협상 전략 수정’이라 할 만하다. 그런만큼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우선 추진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요구된다. 경제·통상쪽만이 아니라 외교안보 등 전반적인 한반도 정세에 끼칠 영향도 고려돼야 했다. 그러나 복수의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 문제는 정부 안에서 경제·통상 문제로 간주됐을 뿐, 외교안보전략을 다루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등에서 정식 논의된 적이 없다”고 전했다. 대통령의 전략적 결정이 외교안보라인에서 공유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노 대통령, 왜 적극적인가=노 대통령은 2월16일 대외경제위원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개방과 경쟁을 통해 세계일류로 가는 길”이라며 “세계최고와 한번 겨뤄보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문제의식의 ‘속살’을 2월26일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오찬에서 구체적으로 밝혔다. “밤낮 중국이 따라온다고 타령만 하고 있을 건가. 우리가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한 분야가 뭐냐. 금융, 주로 고급의 지식서비스 분야다. 특히 기업 관련 분야가 제일 어렵다. 보호 속 성장에는 한계가 있고, 이제 경쟁에 노출시켜 성장시킬 수 있는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한국경제의 새 활로가 뭐냐에 대한 고민의 결과다.” 결국 ‘중국한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미국한테 배워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는 노 대통령이 2004년 12월6일 파리 동포간담회에서 밝힌 “한국 경제가 너무 미국식 이론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데 대해 약간은 걱정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이런 판단이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과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노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의 누구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태도 변화=정부는 애초 지난해 11월 경주 한-미 정상회담 때 자유무역협정 협상 공식 개시를 추진했으나, 미국 쪽이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우리가 그 문제를 꺼내려고 하니까, 미국 쪽에서 ‘정상회담에선 그 얘기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4대 쟁점’에 대한 한국정부의 조처가 미흡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탓으로 보인다. 아무튼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의 태도가 갑자기 확 달라졌는데, 추측컨대 한국이 중국과 너무 가까워지고 있는 거 아니냐는 전략적 판단을 한 듯하다”고 ‘해석’했다. 이와 관련해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미국의 이익을 저해하며 높아지고 있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에 대응하는데,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기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2월3일 양국의 협상 개시 환영성명에서 “자유무역협정은 미국의 아시아 개입을 확대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미국 쪽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에 초기부터 긍정적 관심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무역대표부 대표를 거쳐 지금은 국무부 부장관을 맡고 있는 로버트 졸릭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워싱턴 외교가에서 ‘가속화된 헬싱키 프로세스 추진론자’로 불리는 그는 다이빙궈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과 미-중 고위대화에서 한반도 미래상과 관련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헬싱키 프로세스’란 동·서유럽의 ‘공존’을 목적으로 한 ‘유럽안보·협력회의 헬싱키 최종협약’ 체결(1975)을 비롯해 그 이후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동서간 경제협력·정치대화·인권문제가 ‘3대 기둥’이다. 결국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는 경제영역에서 중국에 따라잡히지 않으려는 한국 정부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미국 정부의 ‘동상이몽’ 속 이해일치인 셈이다.
협상의 또 다른 변수,‘북한문제’=개성공단산 상품에 대한 협정 적용 여부는 벌써부터 한-미간 의견이 갈리는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싱가포르·유럽자유무역연합(EFTA)·동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자유무역협정 협상 선례처럼 개성산은 한국산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방침이 확고하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부정적이다. 주한미대사관 관계자는 “원산지 규정에서 다룰 문제”라고 여지를 뒀지만, 포트먼 무역대표부 대표는 “협정은 남한산에만 적용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북한을 어떻게 다루느냐’를 놓고 한-미간에 시각차가 존재함을 상기시키며, 북핵 및 북한인권 문제의 향방이 협상에 혼선을 초래하고, 한-미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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