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8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판교역 광장에서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천만서명운동본부가 추진하는 경제활성화법 처리를 촉구하는 서명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이정용
김천·문경·영주시 등 직접 나서
휴일도 집집마다 돌며 서명받아
시민들 “21세기에 관권서명이라니”
경북 김천·문경·영주시 등 몇몇 지방자치단체들이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과 관련해, 읍·면·동사무소는 물론 통·반장까지 동원해 시민들의 집을 방문해 서명을 받는 ‘관권 서명’에 직접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오죽하면 국민들이 그렇게 나섰겠느냐”며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추진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한 뒤 재계에서 ‘강제 서명’ 논란이 벌어진 데 이어 지자체가 일선 행정기관을 동원한 관권 서명에 나선 것이어서 파문이 예상된다.
지난 30일 저녁 8시께 경북 김천시 율곡동 ㄱ아파트에 초인종이 울렸다. 동사무소 직원이라고 밝힌 사람은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 경제살리기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서명을 해 달라”고 했다. 주민 김아무개씨는 “아내가 동사무소 직원이라고 해서 서명했다고 한다. 21세기에 행정력을 동원해 서명을 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율곡동사무소 관계자는 “통·반장이 서명을 쉽게 받기 위해 동사무소 직원이라고 말한 것 같다”고 했다.
31일 <한겨레> 취재 결과, 일부 기초단체들이 기업활력제고특별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노동개혁법(근로기준법 등) 등 ‘경제활성화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거나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천시는 29일부터 23개 읍·면·동사무소를 동원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실·과·사업소 사무실에 서명용지를 비치해 민원인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고 있으며, 다음달 2일까지 서명명부를 제출하라고 읍·면·동사무소에 지시했다. 김천시는 전체 인구 14만명 가운데 2만~3만명의 서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일부 읍·면·동사무소는 휴일에도 서명을 받고 있으며, 통장과 반장까지 동원하고 있다. 읍·면·동사무소가 서명명부를 통장한테 전달하면 통장이 다시 반장한테 건네는 방식이다. 일부 통·반장들은 밤에도 아파트를 방문해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문경시는 25~27일 사흘 동안 서명운동을 벌여 전체 인구 7만5천여명 가운데 1만6천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점촌1동주민센터는 이날 서명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일단 기간이 끝났지만, 나중에 통장이 집을 방문하면 부탁드린다”고 했다. 영주시 휴천2동주민센터 관계자도 “오후 6시까지 주민센터로 와서 서명을 하면 된다”고 안내했다.
자치단체 등 행정기관 또는 통·반장 등 공무원에 준하는 이들이 중앙정부 정책 등과 관련해 서명을 받는 관권 서명은 ‘강제 서명’이라는 지탄을 받아 오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뒤 사실상 사라졌다.
김천시 등이 관권 서명을 ‘부활’시킨 것은 경제활성화 법안 서명지에 이름을 올리며 야당과 노동계를 압박하고 있는 박 대통령한테 힘을 실어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활성화 법안은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사안이어서, 자치단체의 서명운동이 선거법을 위반한 것인지 논란도 예상된다.
부산/김광수, 대구/김일우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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