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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3 19:44 수정 : 2005.01.03 19:44

우크라이나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친러파와 친미파의 극단적 대립은 러-미 관계가 새로운 냉전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 가운데 하나다.

지난달 26일 야당 후보인 빅토르 유시첸코의 당선으로 막을 내린 이번 재결선 투표 과정에서 두나라 모두 막대한 지원을 했다. 미국은 약 6500만달러를 쏟아부었는데, 지난해 11월21일 1차 결선투표 직후 실시된 논란 많은 출구조사가 가능했던 것도 미국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강한 반발에도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가 승리했다는 공식 발표가 물거품이 되고 재결선 투표를 실시하게 된 것도 결국 이 출구조사 때문이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내정에 간섭했는가?”라는 질문에 러시아 전문가인 스탠퍼드대 마이클 맥파울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보낸 기고문에서 “그렇다”고 단언했다. 그는 “물론 미국 쪽에선 민주화 지원활동이나 민주주의 촉진운동, 시민사회 지원 등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싶어할 것”이라며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이름을 붙이든간에 미국의 벌인 활동은 우크라이나에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분노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합법적 영향권 아래에 있는 것은 정당하며, 러시아가 압도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모든 분쟁의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판 ‘먼로주의’를 선언한 셈이다.

러시아 남부함대는 1783년 예카테리나 대제가 크미리야 지역을 합병한 이후 우크라이나 크리미야 지역의 심해항인 세바스토폴을 흑해 일대를 순찰하는 자국해군의 모항으로 활용해 왔다.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에도 러시아는 2017년까지 세바스토폴을 조차해 남부함대를 계속 주둔시키고 있다. 이제 러시아는 유시첸코의 당선으로 자국해군을 철수시켜야 할지도 모르게 된 점을 우려하고 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그루지야에 배치되고, 리투아니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전투기가 주둔하게 됐다. 대표적 친러파였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야 대통령이 러시아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자유주의 성향 인물로 교체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서 함대마저 철수시키는 것은 러시아 입장에선 대단한 모욕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한 대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 중재를 폴란드에 맡겼다는 점은 러시아 제도권 안에선 옛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대부분이 확장하는 나토에 편입된 때보다 “훨씬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러시아 전문가인 릴리아 셰브초바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의 연장’쯤으로 여기고 있는 나라에서 벌어진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 유럽이 처음으로 책임을 떠안은 사례”라고 말했다. 미국의 부추김을 배경삼아 유럽이 우크라이나에서 친미정권 수립에 성공한다면,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 몰도바의 트렌스 드네스트르 등 친러파와 반러파가 맞서면서 갈등을 빚고 있는 러시아 주변부 3개 지역에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이 압력을 행사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는 게 셰브초바의 지적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불거진 러시아와 미국의 대립이 핵무기 통제 문제를 두고 두나라 사이에 협력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91년 (미국이 핵무기 및 관련 시설 폐기비용을 부담하기로 한) ‘넌-루거 계획’에 따라 그동안 다소의 진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폐기하기로 계획했던 러시아 보유 핵탄두의 절반 가량이 이미 파괴됐고, 축소하기로 했던 미사일 저장시설의 66%도 이미 폐기가 끝났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러 사이에 전반적으로 긴장이 높아지면서 핵무기 폐기작업이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까지 10여차례나 미국 사찰단의 핵무기 및 생화학무기 시설 출입을 가로막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분노한 푸틴 대통령은 서방진영을 겨냥해 “국제관계에서 독재체제를 구축하려 한다”고 성토했다. 그는 또 “외국군대에 의해 완전 점령된 이라크 땅에서 어떻게 선거가 가능한지 상상할 수도 없다”고 했고, 지난달 6일에는 “유럽이 또다시 동유럽과 서유럽인으로 양분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올해 사상 처음으로 중국영토에서 잠수함과 전략폭격기까지 동원해 중국과 대규모 합동 군사훈련을 하기로 한 것을 두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미국이 보여준 태도에 대해 보내는 경고 메시지라는 지적이 많다”고 전했다.

국립전략연구소의 러시아 전문가 유진 러머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향후 어떻게 진행되는가와 상관없이 러시아 정책에 있어 냉전시대와 비슷한 형태의 ‘신봉쇄전략’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머는 이어 “이미 국내외적으로 위험할 정도로 취약해져 있는 정권을 어떻게 봉쇄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현 정권에 대한 대안은 훨씬 나쁜 정권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러시아가 이른바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으로 여기는 지역에서 미국이 자제하도록 촉구한 그는 유럽뿐 아니라 테러리즘이나 북핵문제 등 세계 전역에서 군축과 핵비확산 등의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비록 쇠약해지긴 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스스로 구석에 몰렸다고 판단할 경우 상당한 해악을 끼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셀리그 해리슨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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