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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3 17:13 수정 : 2005.01.03 17:13

한반도 평화를 찾아서

올해 ‘해방둥이’들은 귀가 순해져 들으면 이해한다는 예순을 맞았다. 하지만 남북을 가로 지른 빗장은 엇비슷하게 나이를 먹고도 뻣뻣하게 버티고 있다. 남과 북 사이는 지난해 7월부터 냉랭하고 북핵 문제는 풀기 어려운 방정식으로 남아있다. 미국과 일본의 똘똘 뭉친 힘 자랑에 북한과 중국은 불안하다. 동북아에 평화가 뿌리내릴 방법은 없는지 그 속에서 남북도 더 살가워질 수는 없는지 홍세화 기획위원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60·현 이화여대 석좌교수)을 지난 28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물었다. 정 전장관은 1977년 국토통일원 4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도록 거의 30년간 한 길을 걸어왔다.

홍세화 “6자회담 교착상태에 빠져…특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제가 화법이 직설적이라 퇴직하니까 말하기가 더 낫네요.” 정 전장관은 화통한 웃음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장소가 시끌시끌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을지 홍 위원이 묻자, 그는 “원래 중요한 이야기는 이런 데서 나온다”며 손사래를 쳤다.


홍세화=2005년은 을사보호조약 100년, 광복과 분단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남북정상회담 5주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현재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어요. 그런데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회담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고 혼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가요?

정세현=노 대통령은 현재로선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낮다는 걸 지적한 거죠. 정 장관은 2005년엔 정상회담이 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희망이나 당위를 이야기한 겁니다. 통일성이 없다는 지적은 좀 과한 것 같습니다. 노 대통령의 남북관계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실용적입니다. 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시키되 추진방식은 개선하겠다고 했어요. 기본적으로 북쪽을 포용하는 자세로 화해협력을 강화해 나가되 국민적 합의를 튼튼히 다져가겠다는 거죠. 발전한 부분은 햇볕정책이 한반도, 남북관계 개선에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던 데 비해, 평화번영 정책은 그 무대를 동북아로 넓힌 거죠.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북관계는 1년에 30차례 이상 대화를 진행할 정도로 관계가 긴밀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도 의미 있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죠. 이런 북한의 변화가 동북아 전체 평화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겁니다. 동북아 평화 틀 속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풀어나간다는 거죠. 평화번영 정책은 햇볕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좀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점에서 ‘네오 햇볕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에 비해 구체적인 진전을 느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남북관계 개선 속도가 느리다고 느낄 수는 있습니다. 상류에서 강 폭이 좁을 때는 속도가 빠르게 느껴지지만 하류에서 수량이 많아지면 느리게 느껴지죠. 아무 것도 없던 시절엔 작은 것도 크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하도 많다보니 귀하게 느껴지지 않는 거죠. 1971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33년 동안 478차례 남북대화를 했습니다. 그 가운데 4분의 1인 119차례가 2000년 6·15 이후 4년 동안에 한 겁니다. 지난해 7월 이후 남북대화가 끊긴 게 안타깝지만, 참여정부 들어 1년4개월 동안 56차례나 남북대화를 하고 합의서도 44개 만들었습니다. 최근 대화는 좀 정체되었지만, 민간 차원의 왕래와 교류는 계속 됐어요. 지난해 11월 말까지 남북왕래 인원이 2만2154명입니다. 남쪽에서 2만명이 넘게 북쪽에 다녀왔죠. 이건 금강산 관광을 뺀 숫잡니다. 재작년에 남북교역액이 7억2400만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북한의 대외교역총액의 4분의 1에 육박할 정도죠. 작년 11월 말까지 재작년 동기 대비 7.3% 정도 교역액이 감소했지만 그래도 연말까지 하면 7억달러 정도 될 겁니다. 감소 원인은 우리 내수가 줄었기 때문이지 남북관계가 악화됐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른바 남북관계 개선 속도 조절론이 부시 행정부의 압력과 관련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참여정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노 대통령이 제2의 디제이인 줄 알았는데 아시아의 블레어가 되기 위해 일본의 고이즈미와 경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려합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 들어선 뒤 지난해 하반기엔 참여정부가 북한인권법 등 미국의 뜻을 거의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죠. 그래서 참여정부가 한미공조라는 틀 밖으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는 겁니다.

홍/ 노대통령 제2 DJ인줄 알았는데…
실용주의 말하지만 사실은 패배주의
정/ 미국이 좀 먼저 입장 완화시켜줘야…
6자회담은 협상…항복이 아니잖습니까

=안에서 일했던 사람이 듣기에 억울한 비판입니다.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 목소리를 내고 미국의 협조 요청을 하려면 우리도 미국에 어느 정도 협조할 필요가 있죠.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가장 큰 국가이익이 걸린 문젠데 동맹국이면서 모른 척 할 수 없죠. 그리고 미국 정부가 내놓고 남북관계 개선의 속도 조절을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우리 여론이죠. 미국이 뭐라고 하기 전에 우리 내부에서 먼저 미국 내 강경론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하면 미국이 화낸다’, ‘정부가 친북반미 아니냐’라고 딱지를 붙입니다. 국민들의 대미종속 의식이 너무 커요. 물론 미국에 대한 시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저도 느끼지만 여전히 남북관계보다 한미관계를 더 중시하는 강경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죠. 1960~70년대 돈을 벌어 남한이 북한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상황을 만들어 놓은 분들 중에 남북협력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도 계시는데 ‘당신들은 빠지시오’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핵심은 우리가 실용주의를 말하지만 사실은 패배적 현실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개성공단도 김대중 정부 때 시작했지만 임기가 끝날 때까지 착공식을 못했어요. 착공식은 참여정부 들어선 뒤인 2003년 6월30일에 했죠. 금강산 육로 관광도 참여정부 때 본격화된 겁니다. 계승 발전 취지에 맡게 가고 있어요. 왜 적극적으로 다른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 못하느냐고 하면 그건 우리 경제 상황이 나쁘기 때문이죠. 핵문제 때문에 남북관계가 시원시원하게 진전되지 못하는 측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선 우리 경제나 여론도 좋아지는 등 여러가지 박자가 맞아야 정부가 끌고나가는 거죠. 물론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도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북한도 민족 공조만 말하지 말고 핵문제 해결에 협조적으로 나와야 돼요.

=구체적으로 북한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요?

=북한도 핵 폐기 또는 핵 포기 태도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이 좀 먼저 입장을 완화시켜주어야 일이 풀릴 것 같습니다. 미국이 조금만 입장을 완화해 주면 우리는 그걸 가지고 북한을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이 핵, 미사일 가지고 미국을 쳐서 세계 강대국이 되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방어적인 측면도 있지만 최근엔 협상용으로 이용하고 있는 거죠. 경제는 나아질 줄 모르고 도와주는 나라는 없으니까 미국과 1대1로 붙어서 한꺼번에 체제인정도 받고 경제지원도 끌어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에 맞게 북한을 다루자는 겁니다. 미국은 ‘네가 완전히 발가벗고 난 뒤에 돈을 줄지 안 줄지, 뭐를 줄지 결정하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협상이 안 되지요. 6자회담은 협상이지 항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 협상 마당을 벌여 놓고 협상 상대를 겨냥해 ‘체제변형’을 이야기하는 것도 좀 성급한 것입니다. ‘나 너 없애려고 했지만 없애지는 않겠다, 그 대신 너는 질적으로 아주 변화해야 돼’라고 하면 협상에 나오겠습니까? 베트남, 중국에 대해서는 체제인정하고 경제적 지원도 하지 않았습니까? 손을 잡아주면 핵문제도 해결되고, 결과적으로 북한의 선택에 의해 체제변형도 될 겁니다. 그런데 왜 북한에 대해서만 먼저 체제변형부터 요구하고 아무 것도 안 주느냐는 겁니다.



홍 위원은 참여정부가 미국 앞에서 줏대가 없어 남북 관계 개선에 주도적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고, 정 전 장관은 현실 외교를 무시한 억울한 비판이라고 받아쳤다. 정부에 대해선 시각이 엇갈리던 두 사람은 미국이 바뀌어야 핵문제도 풀 수 있다는 덴 한 목소리였다.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항상 전제로 하는데 그건 일방적이죠.

=그렇죠. 그런데 미국 대선 끝나고 미국 관료들이 다른 뉘앙스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죠. 좀 진전된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북한이 협조적인 자세로 나오면 ‘대담한 접근’을 하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흘렸습니다. 오는 1월20일 미국 대통령 취임 즈음엔 좀 확실하고 좋은 메시지를 북한에 주었으면 좋겠어요.

=미국은 자신이 충분히 큰 나라고 베트남처럼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왜 북한을 ‘악의 축’이라 말할까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북한과 같은 악의 축이 필요한 것이죠. 일본을 미사일방어체제(엠디)에 끌어 넣기 위해서도 ‘깡패’ 북한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 주한미군의 ‘이전’ 또는 ‘변형’ 을 꾀하는 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건데 이를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북한이 계속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야 하죠. 요컨대, 우리에겐 미국의 국익 관철과 한반도 평화 정착이 모순 관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미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등을 이유로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죠. 또 일본도 군사대국이 되려고 하는데 북한이 여기에 빌미를 주고 있어요. 북한이 자신의 체제안전을 제대로 보장받으려면 동북아 평화 정착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북한도 버티기만 하지 말고 큰 틀에서 문제를 보고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북한보다도 남한 정부가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균형감각에 바탕을 둔 일관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요. 친미에서 반미적인 발언까지 널뛰기처럼 나오고요.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하는 것과 미국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반미와 친미로 구분하면 지나친 흑백논리죠. 우리 목소리를 내는 걸 반미라 부르는 건 문젭니다. 예전엔 미국에 ‘노’라고 말하는 건 꿈도 못 꿨지만 이제는 우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큰 나라가 됐어요. 또 미국에 협조할 일 있거나 기분 좋게 할 일 있으면 하는 게 외교입니다. 이를 무조건 친미라고 하면 곤란하죠. 정부가 자기 입장을 가지고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문제제기하는 식으로 능소능대하면서 자기 국가이익을 챙기는 것이 올바른 외교 아닌가요? 그런 점에서 북한은 너무 경직돼 있는 게 문제에요.

=그런데 소파개정부터 이라크 파병, 그리고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까지 과연 미국에 대해서 ‘노’라고 말해야 할 때 ‘노’라고 말한 게 구체적으로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정세현 “20일 미대통령 취임 즈음 북한에 좋은 메시지 줬으면”

=협상에는 최고목표와 최저목표가 있죠. 정부가 협상 전에 자진해서 ‘우리가 이만큼 달성하겠다’고 발표하지는 않죠. 언론이 ‘~할 듯’ 보도하니까 국민들은 기대했다가 협상 결과 중간 선쯤에서 끝나면 된 게 없다고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언론이 너무 앞서 가요. 어떤 때는 결과적으로 협상을 아주 못하게 합니다. 주독, 주일 미군 소파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이 더 열악하죠. 국민소득 2만달러가 돼 우리 위상이 더 올라가고 우리가 내는 분담금이 커지면 달라질 겁니다.

=분담금은 우리가 더 많이 내고 있어요. 일본과 한국이 제일 많이 내죠.

=일본이나 독일은 미국 무기를 얼마나 많이 사줍니까. 우리는 등골이 휘어지지만 그만큼 안 되죠.

=우리도 무기 많이 삽니다. 미국의 군사 전략은 어디서나 선제 공격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 그리고 자신과 대등한 군사력을 어느 지역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전자는 북한이, 후자는 중국이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군사전략에 따른 주한미군의 변용 비용도 우리가 대주는 상황 아닌가요?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재판관할권 문제도 시원하게 처리했으면 좋겠지만 처음에 워낙 우리에게 열악하게 협정이 맺어져 올라가야할 계단이 너무 많은 겁니다.

=미국이 북핵 해결 원칙을 좀 더 유연하게 바꾼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북한이 미국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게 만든 과정이 있었죠. 제네바 협정 파기 문제도 있었고요. 또 핵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인권 문제를 들고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결국 돌파구를 열어줘야 하는 건 남쪽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구체적인 것에서 미국에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북한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피해 의식이나 공포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안심시키는 구실을 우리가 해야죠. 북한이 조문 문제 등으로 대화를 끊은 건 잘못한 겁니다. 북한을 돕기 위해서라도 빨리 남북대화를 열어야 해요.

=단기적으로 특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으십니까?

=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에 의사소통을 매개할 인물이 필요합니다. 실무선에서 특사로 가 꼬인 걸 풀어야죠. 중요한 건 핵 문제이고 북한이 살아남아야 한반도의 안정이 가능해집니다. 이럴 때는 사실 북한이 먼저 이야기 좀 하자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족집게 과외선생은 아니지만 미국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북한은 이를 감안해 어떤 변화를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북한은 미국에 대해서 독학하고 있는 셈인데, 남북대화도 닫아놓고 이러면 안 됩니다.

=탈북자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 전장관이 벗어뒀던 코트를 걸쳐 입었다. 춥냐고 물었더니 “탈북 문제 물으니 추워진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권과 남북관계가 얽혀 풀기 쉽지 않은 문제라 그런지 그는 입을 떼기 전에 차부터 한 모금 마셨다.

=탈북자 문제엔 두 차원이 있죠. 하나는 이미 북한을 떠나 제3국에 있는 사람들을 한국에 입국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입국 뒤 정착을 도와주는 겁니다. 대개 입국시키는 문제엔 관심이 많죠. 입국을 주선하는 단체들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려고 제3국의 언론과 협조해 사건을 키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비인도주의적 환경에 몰리게 돼요. 단속이 강화되니까요. 그래도 중국 정부가 초기보다 훨씬 탈북자 문제에 관해 한국 정부에 협조적이지만 기획탈북이 계속되면 문제가 꼬일 수 있어요. 탈북자들의 국내 정착과 관련해선 정착지원금이 이른바 ‘탈북 브로커’에게 넘어가는 걸 어떻게 단속하느냐가 중요한 문젭니다. ‘브로커’는 제3국인이 많고 실제로 ‘거래’가 일어나는 곳이 제3국인 경우가 많아 국내법으로 다스리는 데 한계가 있죠.

=미국은 북한인권법을 만들고 3천만달러를 예산으로 책정해 뒀습니다. 그 돈의 일부는 탈북을 기획하는 단체나 개인 ‘브로커’ 등에 흘러갈 거고 북한을 예민하게 할 겁니다.

=그런 단체들이 미국 정부한테 더 큰 지원을 받으려고 활동을 강화할 수 있죠. 그렇다고 우리 정부가 미국 대통령 서명까지 끝난 법을 집행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요. 제3국에서 그런 일 하는 분들이 조금 자제해야겠습니다. 크게 보아 결과적으로 동북아의 평화 번영에 도움이 안돼요.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탈북을 도울 수 있겠지만 일이란 게 순서가 있어요.

=우리가 미국에도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데 탈북을 기획하는 사람들에게 동북아 평화를 이유로 들며 설득한다고 되겠습니까?

=북한에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게 성급한 감이 있습니다. 생존권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데다 대고 미국적 수준의 자유권적 인권, 정치적 인권을 보장하라고 하면 아이가 걷지도 못하는 데 마라톤 선수 안 된다고 닦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홍세화 “참여정부가 김대중정부에 비해 구체적 진전 느낄 수 없어”

=미국 카터 대통령 때 인권 외교를 한다니까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인권 좋아하시네’와 비슷한 발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 말을 ‘먹고사는 문제가 앞서는 거 아니냐’로 받아들였죠. 흥미로운 건 지금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사람들이 군사정권 시절 정치적 자유에 앞서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고 했던 기득권 세력이라는 거죠.

=생존권적 인권 주장하던 사람들이 북한한테는 다른 모습을 보이니 모순이죠. 탈북 행렬이 줄어들 수 있도록 북한의 경제난을 풀어주는 게 결과적으로 국제 사회가 말하는 수준의 인권 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겁니다.

=대미 대북 전략에선 노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해 준비가 덜 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외교·국방·통일에 대한 일관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죠. 참여정부의 대미·대북 정책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꿨습니다. 그 전엔 뭐든지 정부가 먼저 협의를 하고 난 뒤 민간이 뒤따라왔는데 햇볕정책의 핵심은 민간을 앞세운 것이었죠. 또 북쪽에 포용하는 자세로 접근했죠. 노 대통령이 통일문제에 있어서 김 전 대통령보다 준비가 덜 된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노 대통령은 새로운 흐름을 잘 끌고 가면서 그 볼륨을 키우면 되는 겁니다.

홍/ 올해는 을사보호조약 100년 되는 해
한반도 정세가 한세기전과 비슷…
정/ 우리나라 결코 작은 나라 아닙니다
이제 변방의식 떨쳐낼때 됐다고 봅니다

=물 흘러가듯 가면 좋은데 바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개성공단에서 냄비가 나왔을 때 ‘왜 냄비 수준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미국의 경제 제재 틀 속에서 조금이라도 전략적인 기술이 담긴 건 만들지 못한 건 아닌지요. 어느 정도 흘러오면 큰 걸림돌이 사라져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딱 막혀있는 상황이 아니냐는 겁니다.

=북한에 전략기술 등 수출을 금지한 바세나르 협약의 제약을 받아서 냄비가 먼저 나온 게 아닙니다. 개성공단에 첨단 기술인 로만손 시계공장도 짓고 있죠. 그런 건 자본이 들어가 물건이 나오는 기간이 좀 긴 거죠. 특히 북한에서 2004년 안에 수건 한 장이라도 개성공단에서 나와야 된다고 했어요. 대남 경협사업하는 사람들이 군부 보기 민망하다고요. 한미 관계는 조야에 발이 넓은 홍석현 대사가 새로 임명돼 잘 조율해 나가리라 봅니다. 지금은 백악관 등 공식 라인보다 그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좀 다독거리는 게 필요한 시기거든요. 참여정부 대북정책 가운데 부족한 점은 정부의 정책 추진 상황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부분이죠.

=언론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고요. 정부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제가 정부에 있을 때는 직접 여론지도층을 만나 남북관계 상황에 대해 설명했어요. 17개월 동안 24차례 ‘열린통일포럼’을 통해 7천~8천명을 만나 정보를 공유한 거죠.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국방부도 해도 괜찮은 정보까지 공개하는 걸 겁내면 안 돼요. 정보를 국민과 공유할 때 정책이 힘을 받는 겁니다.

=특히 국방부는 정보 공개 수준이 옛날 소련의 케이지비 정도 아닌가요? 예를 들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미국 쪽에선 합의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국방부는 전혀 아니라는 반응을 내놓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을 깨야죠. 우리 위치나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다른 건 알려야 합니다. 당국자가 나서서 먼저 설명하면 오히려 기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그걸 모르니 협상력이 커질 수도 있는 겁니다. 또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좋아져요.

=올해엔 4대 개혁입법이 어떻게든 마무리되겠지요. 열린우리당은 개혁을 내걸었으니 다른 개혁의 화두를 제시해야 할 상황이죠. 민생문제는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포섭돼 있는 상황이고요. 붙들 수 있는 건 남북관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 정부, 청와대가 이라크 파병엔 일사불란하면서 대북관계에선 일관성을 갖지 못할 만큼 동력이 달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정세현 “북한도 버티기만 하지말고 큰틀에서…태도를 바꾸어야”

=통일성이 없는 건 정보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정상회담이 어떤 상황에서 가능한지 현재는 어떤지, 학습 차원의 정보 공유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거 없이 불쑥 이야기해요. 여론지도층과 정보를 공유하기 전에 먼저 당, 정부, 청와대가 정보를 공유해야죠. 특히 정치권에서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최소한 적실성이 있는지 좀 챙겨보고 나서 말할 필요가 있어요.

=올해가 을사조약 100년이 되는 해라서 그런지 일부에서는 한반도 정세가 한 세기 전과 비슷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대만과 북한을 놓고 중국과 미국이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피해의식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많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 못하고 언제나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고 칼 끝을 쥐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어요. 100년 전엔 청일전쟁 등 여러 과정이 있었죠.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권력 분할이라는 점에선 차이가 없잖습니까?

=그건 너무 단순하게, 그리고 도식적으로 대입을 하는 것 아닌가요? 100년 전엔 우리나라가 힘이 너무 약했죠.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노파심에서 문제 제기하는 건 좋지만 자신감에 차 있는 젊은 사람들의 기를 꺾지는 말아야죠.

=지금 말씀은 노파심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참여정부가 들어야 하는 것 같은데요.

=이제는 우리 국민들이 대외패배주의와 변방의식을 떨쳐내고, 자기의 입장을 가지고 국제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정리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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