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1 18:42
수정 : 2020.01.02 13:12
이용인 ㅣ 국제뉴스팀장
믿기지 않는 얘기가 최근 여기저기서 들린다. 내용은 꽤 구체적이다. 미국이 추진하겠다고 밝힌 중거리미사일의 아시아 배치를 한국에 끌어오면 어떻겠냐는 식의 얘기를 정부 고위 당국자가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와전된 ‘소문’이라고 믿고 싶다. 정부 당국자가 아무리 비공식적 자리에서라도 그렇게 무책임한 소리를 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엇비슷한 분위기의 기사가 최근 나온 것을 보면, 또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턱없는 얘기는 아닐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든다.
쓸데없는 기우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뻔한 얘기임에도 미국의 중거리미사일 한국 배치가 초래할 ‘엄중한’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미국은 1987년 당시 소련과 맺은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탈퇴를 지난해 8월2일(현지시각) 공식 발표했다. 중거리핵전력 조약은 사거리 500~5500㎞의 지상 발사 핵과 재래식 탄도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배치를 금지하는 조약인데, 미국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이 조약에 묶여 있는 동안 중국이 중거리미사일 등을 개발해 배치해왔다며, 조약 파기가 중국을 겨냥한 것임을 숨기지 않았다.
다음날인 3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전용기 안에서 지상 발사 중거리미사일의 아시아 배치를 선호한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번졌다. 외신에선 한국, 일본, 괌 등이 후보지로 오르내렸다. 다시 하루 뒤엔 중거리미사일의 아시아 배치와 관련해 “해당 지역 동맹 및 파트너들과 협의를 거쳐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지금까지 단호하다. 미국의 중거리미사일 배치를 검토하거나 미국과 협의한 바도 없으며, 그럴 계획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공식 입장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우리 정부에 배치 협의를 요청했다는 정황 증거도 없다. 그런데도 정부 고위당국자가 정부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을 하고 다니는 게 사실이라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중거리미사일은 명백한 공격용이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는 그나마 탐지용이고 방어용으로, 상대방이 먼저 미사일을 발사하면 이에 대응해 요격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공격용 중거리미사일이 한국에 배치되면, 사드 사태 때와는 차원이 다른 후폭풍이 한-중 관계에 불어닥칠 것이다.
사드는 그나마 북핵 미사일을 방어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라도 있었다. 중거리미사일 배치는 그런 표면적인 이유도 대기 힘들어 중국을 겨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러시아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한국이 앞장서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미국의 총알받이가 되겠다는 것인데, 중거리미사일을 ‘지렛대로 쓰자’느니 하는 발상을 할 수는 없다. 정부 고위 당국자가 그런 구상을 내비치고 있다는 전언을 부정하고 싶은 이유다.
아닐 것으로 믿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야 하는 정부 고위 당국자가 그런 ‘불충’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박근혜 정부 때의 ‘사드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왔다. 지난달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과 리커창 총리와 회담을 하며 사드 사태로 망가진 한-중 관계를 거의 정상 궤도에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중 및 국내 갈등을 증폭시킬 중거리미사일 배치 구상을 언급하는 것은, 소문만으로도 문 대통령이 어렵사리 풀어온 대중 관계에 재를 뿌리는 것이다.
중거리미사일 배치는 사실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고 모든 외교 자산을 미국에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주변국 움직임과도 맞지 않는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는 국내의 강한 반중국 분위기에도 올해 4월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을 성사시키는 등 중국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과 거꾸로 가는 것은 판세를 잘못 읽은 것이다. 소문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yyi@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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