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8 18:23
수정 : 2019.12.09 14:58
조형근 ㅣ 사회학자
지난달 쓴 칼럼
‘대학을 떠나며’가 꽤 반향을 일으켰나 보다. 교수 노릇이 힘들어 그만뒀다는 넋두리가 그리 관심을 끌 줄은 몰랐다. 그저 대학의 현실을 솔직하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썼다. 겸연쩍게도 개인사를 공적 지면에 올린 이유다. 그런데 예상보다 반응이 컸다. 내가 제일 놀랐다. 오전부터 문자, 전화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후가 되자 심상치 않아졌다. 생전 안 들어가던 페이스북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연구자는 물론 사기업 다니는 직장인 중에도 칼럼에 공감하는 이들이 꽤 있어 보였다. 논쟁을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칼럼의 주제는 황폐해진 대학과 지식생산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사람들이 공감한 건 교수조차 탈진할 만큼 과로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고발이 아니었나 싶다.
간혹은 독서와 사색을 위해 사직했다는 정규직 교수의 ‘사치스런’ 고민을 고까워하는 시선도 있었다. 그 마음 이해한다. 밥벌이가 퍽이나 고단한 세상이다. 속 편한 소리로 들렸으리라. 밥그릇 지키는 교수들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럴 법하지만 내가 바란 반응은 아니다. 그날 저녁, 부랴부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밥그릇 사수는 고귀한 일이라고, 밥그릇 함부로 걷어차면 안 된다고 썼다. 식구가 있다면 더욱더. 어느 시구절에서처럼 밥이 하늘이다. 밥그릇을 지키면서 일터를 고쳐나가는 게 올바르다. 나는 그 수고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뛰쳐나왔을 뿐. 오래전부터 적지 않은 교수, 연구자들이 대학의 정상화, 공공성 강화를 위해 싸우고 힘써왔다. 경의를 표한다. 부디 잘되길 바란다.
일터의 한국인들이 얼마나 과로하고 있는지, 괴로워하고 있는지 굳이 데이터를 동원해서 거론하고 싶지 않다. 육체의 과로만이 아니다. 수직적, 폐쇄적, 폭력적 조직 문화에 마음도 병들기 일쑤다. 결국 탈진한다. 수많은 직장인이 속으로 골병이 드는 이유다. 대부분 탈직장의 삶을 꿈꾼다. 그만두지 못하는 건 바깥도 지옥인 탓이다.
내가 탈출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맞벌이하는 처의 동의와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외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결정이었다. 비빌 언덕이 있으니 덜 막막하다. 사실은 비빌 언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마을이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직한 지 한 달 남짓, 백수가 과로사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빴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일은 11월 말, 우리 동네 합창단의 공연이었다. 4년 반쯤 전 마을의 중년 남자들이 노래모임을 만들었고, 머지않아 여성들도 동참했다. 내 기타 반주가 전부에다 악보도 잘 못 보는 소박한 동네 합창단이다. 간혹 지역 행사에 찬조 출연을 하곤 했다. 우연히 인연을 맺은 성미산마을 생협 합창단의 제안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으니 정식 공연은 처음이다. 백수라고 온갖 공연 관련 잡무를 자임했더니 직장 때만큼이나 바빴다. 첫 경험이라선지 다들 기쁨과 아쉬움이 만발이다. 공연이 끝난 뒤 더 왁자지껄, 내년을 다짐하고 있다.
합창 공연 다음 날은 조합원으로 있는 동네서점 이삿날이었다. 넓고 밝고 예쁜 데로 이사했다. 공연 준비로 바쁘다며 기여를 못 했건만 타박하지 않아서 고맙다. 동네 사람 몇이서 시작한 서점은 작년에 참여 인원을 늘리며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올해는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돼서 지원이 좀 늘었다. 책으로 엮는 문화 프로그램들이 다양해서 여러모로 유익하다.
평생 이웃이라곤 모르고 살았다. 5년 반쯤 전 이곳에 와서 우연히 마을살이가 시작됐다. 공동체살이를 작정하고 온 사람이 없는 ‘어쩌다’ 공동체다. 우연한 계기들이 겹쳤다. 아무튼 삶이 변했는데 무엇보다 풍족해졌다. 할 일, 놀 일, 공부거리가 자꾸 생긴다. 교수를 때려치워도 당장 할 일이 마땅치 않으리라는 걱정이 없었던 이유다.
공동체를 이상화할 생각은 없다. 지식생산체제의 황폐화, 과로, 불평등 같은 거시적 문제들을 공동체살이로 풀 수는 없다. 그건 정치로 해결해야 한다. 사람 사는 곳이라 갈등도 있다. 공동체가 우리 삶의 진정한 대안인지도 더 따져봐야 한다. 내 공부의 화두 중 하나다. 그래도 비빌 언덕이 있어 마음의 병이 더 크기 전에 그만둘 수 있었다. 내 행운이고 복이다. 알고 보면 모두 외롭고 힘들다. 서로 이웃을, 친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눈을 뜨고 동네를 찬찬히 살펴보시라. 나도 그렇게 우연히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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