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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05 18:20 수정 : 2019.12.06 09:41

최재봉 ㅣ 책지성팀 선임기자

“누가 무어라고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롯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요즈음 느끼는 일’이라는 산문에서 이렇게 쓴다. 호가 난 술꾼이었던 김수영은 자신에게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라고까지 말한다. 사랑을 소재로 쓴 김수영의 시가 많지 않은 가운데, ‘사랑’과 ‘사랑의 변주곡’은 그의 모든 시를 통틀어서도 절창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사랑’)나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사랑의 변주곡’)라는 구절들은 김수영에게 사랑이 지니는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그에게 그런 사랑의 가치에 상응하는 것이 술이었다. 그의 이른 죽음이 술과 무관하지 않은 사고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술을 향한 그의 순정과 믿음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 김수영뿐일까. 동서고금의 문인들에게 술은 사랑의 매개요 영감의 원천으로서 열렬한 찬미의 대상이 되어 왔다. 중국의 이백과 페르시아의 오마르 하이얌에서부터 프랑스의 보들레르와 미국의 찰스 부코스키에 이르기까지 술을 사랑하고 예찬한 이들의 목록은 그 자체로 문학사를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한국문학으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수주 변영로의 <명정 40년>과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김병익의 <한국문단사>와 ‘명동백작’ 이봉구의 문단 일화들에는 한결같이 술 향기가 진동한다. 최근에 나온 시선집 <잔을 부딪치는 것이 도움이 될 거야>는 누룩이 익어 술이 되듯 술이 문학으로 승화되는 양상을 52편의 시에 담았다.

“바람이 불면 그렇게 할 일이다 그 술이라든가 사람이라든가에 취하여 쓰러질 일이다 다시 눈을 뜨고 술 마실 일이다 그럴 일이다 (…) 이제 술 취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아 그 많은 날들의 서러운 그리움을, 저 불어오는 바람을 어쩌란 말이냐”(박남준 ‘흔들리는 나’ 부분)

<잔을 부딪치는 것…>에 실린 박남준의 권주가에서는 보들레르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이런 권고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파리의 우울> 중 ‘취하라’ 부분)

망각과 도취. 박남준과 보들레르가 술에서 기대하는 것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으리라. 무겁고 무서운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영원과 초월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술과 취기에 기대보자는 것이다. 두 시인의 이런 태도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 이들보다 천 년 가까이 앞서 살았던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시집 <루바이야트>는 술과 사랑이라는 현세의 쾌락을 향한 찬사로 출렁인다. 한 달여 전 페르시아어 원전 번역으로 나온 시집 <로버이여트> 중 108번째 노래는 이러하다.

“저 술은 영원한 삶이니 마시어라/ 젊음이 가진 기쁨의 원천이니 마시어라/ 불꽃처럼 슬픔을 태워 없애지만/ 물처럼 삶의 활력 나눠 주니 마시어라”

술은 물로 된 불이다. 술은 찬 가슴을 덥히고 삶의 무게를 휘발시키지만, 자칫 그 불꽃이 이성과 현실감각을 소진시킬 수도 있다. 역시 소문난 애주가였던 조지훈은 ‘주도 유단’이라는 글에서 술 마시는 단계를 열여덟으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불주에서 시작해 술로 말미암아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된 열반주까지가 그 열여덟 단계인데, 지훈 자신은 바둑으로 치면 1급에 해당하는 학주(學酒)를 최고의 경지로 친다. 1단인 애주 바로 아래 단계로, 어디까지나 배우는 자세로 마시라는 뜻이겠다. 그는 또 같은 글에서 “주정도 교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고도 했다. 바야흐로 술 마실 일이 많은 무렵이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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