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세상읽기] 노인은 없다 / 신영전 |
신영전ㅣ한양대 의대 교수
노인은 없다. 무슨 말장난이냐고 하겠지만 사실이다. 저출산·고령화를 막는답시고 2006년부터 13년간 쏟아부은 예산이 269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여러 정권이 공권력을 총동원하고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참여했는데도 고령화 속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쏘아댄 수많은 화살이 한번도 명중하지 못했다면 노인이란 과녁이 없는 게 틀림없다.
늙는 것은 젊음을 잃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인형 안에 인형이 있고, 그 안에 또 작은 인형이 자리하고 있는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목각 인형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 삶의 결손이 아니라 축적인 것처럼 노년은 청춘의 결손이 아니라 그 모든 지나간 삶을 품는 것이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어느 양로원 할머니가 남긴 시에서도 발견된다.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 성질머리도 괴팍하고 눈초리마저도 흐리멍텅한 할망구일 테지요./ …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처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 것을…”
1900년대 전반기를 살았던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가 알도 레오폴드의 책 <모래 군의 열두 달>에는 수령이 80년쯤 된 나무에 톱질을 하며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그때 그가 잘랐던 나무가 서울 남산 위의 소나무였다면 그의 회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첫번째 톱날에 제일 먼저 잘려져 나간 것은 2년 전 추운 겨울날 광화문에 모여든 사람들의 불빛과 함성이 스며 있던 껍질이었다. 두번째 톱질에 잘려진 것은 10년 전 부엉 바위에 올랐던 전직 대통령과 평생 민주화를 위해 살다 간 또 한명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의 눈물이 만들어낸 수분, 그리고 부패한 권력에 상처받은 한 여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바라보았던 밤하늘의 스산한 기운을 품은 나이테였다. 이렇게 톱질을 한번씩 할 때마다 근 10년의 시간이 함께 잘려 나가고 마지막에는 이 나무가 겨우 자리 잡아 서기 시작했던 80년 전 속살도 마침내 잘려 나갔다. 그 부스러기엔 1939년 일제가 전쟁을 위해 새로 제정한 방공법에 따라 수시로 울려 대던 사이렌 소리,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살기 어려워진 식민지 조선을 떠나 만주벌판으로 향하던 청년들이 뒤돌아 올려보던 비장한 눈길도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레오폴드는 우리가 늙은 나무 한 그루를 잘라 만들어낸 두 더미 톱밥이 한 세기의 통합적 단면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늙은 나무와 늙은 몸이 어찌 다르겠는가?
나이 듦에 대한 이런 인식의 변화는 우리에게 나이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제공하고, 이는 다시 효과적인 정책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나이 든 이들의 온존(well-being)은 노령연금, 복지관 재활서비스, 중환자실 제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졸지 않아도 되는 풍요로운 어린 시절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어린 시절은 실직을 걱정하지 않고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워라밸’이 가능한 부모와 따뜻한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의 사회정책은 특정 세대, 젠더, 약자 집단의 희생을 전제로 한 모델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제일 먼저 희생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 모델은 한시적으로 작동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형이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65살을 넘은 이들의 자살률이 전체 자살의 약 30%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3.5배, 일본의 2.3배에 이르는 수치다. 한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살 가치가 없다고 믿었던 병든 노파를 도끼로 내려쳤을 때 진정 살해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어린이와 청년을 가슴에 품은 나이 든 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사회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내 안에 어린 시절의 내가 들어 있다는 말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가?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장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를 듣거나, 젊은이의 축제가 펼쳐지는 곳을 가로질러 갈 때 당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지 않던가? 그래도 믿겨지지 않는다면, 오늘 밤 조용히 방에 홀로 누워 거칠고 무뎌진 몸의 겉옷을 살짝 들쳐 안을 들여다보라. 보이는가? 노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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